웅진지식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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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첫문장이었을 때> -김민섭 외 6인-비소설/국내 2023. 12. 27. 15:01
1. 책임지지 못 할 일은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사실 나는 그게 ‘시작’인줄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백지에 별생각 없이 점 하나를 찍고 말 때, 누군가는 그 점에서부터 시작하는 어떤 긴 선을 그리려고 한다는 걸 알아채지 못했다. 알았어야 했다. p.95 2. 순간의 기분으로 문 너머 외로운 누군가에게 다가가려다가도, 가장 따뜻한 방식으로 결국에는 가장 차가웠던 그때의 내가 떠올라 발을 멈춘다. 끝까지 내밀 손이 아닐 것 같으면 이내 거둔다. 항상성이 없는 섣부른 호의가 만들어 내는 깨지기 쉬운 것들이 두렵다. 그래서 늘 머뭇댄다. ‘그럼에도’ 발을 디뎌야 할 때와 ‘역시’ 디디지 말아야 할 때 사이에서. p.96 3. 삶이란 아마도 그렇게 어떤 날씨들과 함께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무엇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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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카페에서 작가를 만나다 1> -김용규-비소설/국내 2023. 11. 2. 11:04
1.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처럼 긍정성이 과잉인 사회가 우리를 점점 더 극단적인 자기-몰아세움과 자기-닦달로 몰아간다는 사실이다. 오직 자신의 능력과 성과를 통해서 존재감을 확인해야 하는 우리의 자아는 피로해지고, 스스로 설정한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는 좌절감은 우울증을 낳는다. 그럼으로써 자기 상실에 빠지게 한다. 한병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규율사회의 부정성은 광인과 범죄자를 낳는다. 반면 성과사회는 우울증 환자와 낙오자를 만들어낸다.” p.93 2. 오늘날 자본주의가-소비이데올로기의 전도사인 대중문화를 통해-우리를 길들이는 책략은 “욕망을 자극하고 최대한 흥분시킨 다음에 극단적인 형태로 재갈을 물리는 것”이다. “자극하고 금지하기, 온갖 성욕을 일깨운 뒤에 그것의 만족을 억압하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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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헤르만 헤세-비소설/국외 2023. 11. 1. 11:36
1. 거대한 여름목련나무를 북쪽 지방의 봄목련나무와 혼동하면 안 된다. 여름목련나무는 그처럼 아름답긴 하지만 늘 나의 다정한 친구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어떤 계절에는 근심 어린 생각에 잠겨, 적대감을 갖고 그 나무를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그 나무는 10년 동안 내 이웃으로 지내면서 자라고 또 자라 무성하게 뻗어 나갔다. 봄가을 몇 달 동안은 아침의 한 줌 햇빛도 그 나무에 가려 내 방 베란다에 궁둥이를 붙이지도 못하고 지나갔다. 나무는 마치 거인 같았다. 어떤 때 보면 수액을 철철 내뿜으면서 격렬하고 무성하게 성장하는 것 같다. 강인한 힘으로 신속하게 위로 뻗쳐 나가면서도 때로는 어딘지 눅눅하게 흐늘거리는 젊은이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한여름 꽃피는 시절이 되면 나무는 화려하고 충만하고 부드러운 위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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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기의 감각> -앤 라모트-소설/국외 2023. 10. 24. 11:27
1. 처음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때부터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낱낱이 적어 내려가 보라. 유치원 시절부터 시작해도 좋다. 되도록 그 어휘들과 기억들을 당신에게 떠오르는 그대로 적으려고 노력하라. 당신이 쓴 것이 그다지 좋은 내용이 못 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걸 읽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유치원 시절부터 초등학교 1학년 때로, 2학년, 3학년 때까지 조금씩 옮겨가는 것이다. 담임 선생님은 누구였고, 반 아이들은 누구였는가? 당신은 무슨 옷을 입었던가? 당신이 질투했던 친구나 갖고 싶었던 물건은 없었는가? 이제 약간 더 가지를 뻗어 보자. 그 시절 당신의 가족들이 휴가를 떠난 적이 있는가? 이러한 것들을 종이에 적어 보라. (...) 더 구체적인 것들도 짜내어 보라. 거기서 사람들이 무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