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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헤르만 헤세-
    비소설/국외 2023. 11. 1. 11:36

     

     

    1. 거대한 여름목련나무를 북쪽 지방의 봄목련나무와 혼동하면 안 된다. 여름목련나무는 그처럼 아름답긴 하지만 늘 나의 다정한 친구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어떤 계절에는 근심 어린 생각에 잠겨, 적대감을 갖고 그 나무를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그 나무는 10년 동안 내 이웃으로 지내면서 자라고 또 자라 무성하게 뻗어 나갔다. 봄가을 몇 달 동안은 아침의 한 줌 햇빛도 그 나무에 가려 내 방 베란다에 궁둥이를 붙이지도 못하고 지나갔다. 나무는 마치 거인 같았다. 어떤 때 보면 수액을 철철 내뿜으면서 격렬하고 무성하게 성장하는 것 같다. 강인한 힘으로 신속하게 위로 뻗쳐 나가면서도 때로는 어딘지 눅눅하게 흐늘거리는 젊은이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한여름 꽃피는 시절이 되면 나무는 화려하고 충만하고 부드러운 위엄을 띤다. 나뭇잎들은 바람 속에서도 꿋꿋하게 빛나고 덜그럭덜그럭 소리를 내며 마치 니스 칠을 한 듯 반짝거린다. 그러면서도 부드럽고 아름답지만 너무나도 덧없는 자신의 꽃잎들을 보듬으려고 애쓴다.

     커다랗고 창백한 꽃잎들을 거느린 이 거대한 나무 건너편에는 다른 나무가 한 그루 서있다. 그 나무는 난쟁이처럼 왜소하다. 내 작은 베란다 화분 속에서 자라는 실측백나무이다. 키가 채 1미터도 안 되는 난쟁이나무지만 벌서 4년이나 나이를 먹었다. 작은 마디에는 단단한 자의식이 맺혀 있다. 위엄에 가득 차 있으면서도 마치 기인처럼 웃음을 자아내는, 조금은 감동적이고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이 이중성을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그 나무는 근래에 생일 선물로 받은 것이다. 개성이 강한 이 나무는 가지가 수십 년 동안 폭풍에 시달려 마디가 생긴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겨우 손가락만 하다. pp.54-55

     

     

    2. 지나치게 고가로 팔리는 너무나도 어리석은 낙관주의. 사람들은 그래서 전쟁과 비참함, 죽음과 고통마저도 그저 환상으로 떠올리는 아둔한 것쯤으로 치부한다. 그리고 어떤 근심이나 문제 따위도 알려 하지 않는다. 미국의 그것을 흉내 내 지나치게 큰 거인이 되어버린 이 낙관주의 때문에 사람들의 정신은 과장되거나 억눌린다. 비판적인 시각을 잃어버린 눈먼 정신이 심각한 문제를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분홍빛 어린아이 같은 세계에 적대감을 갖고서 거부하려 한다. 유행을 따르는 철학자들의 저서나 잡지에도 그런 것이 반영되어 있다. p.59

     

     

    3. 당시 독일 국민은 그 낙관주의를 토대로 모든 것이 훌륭하고 황홀하다 여겼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이란 원래 매우 위험하며 폭력적인 사업이라고 말하는 사람들과, 전쟁은 아마도 독일 측에 비참하게 끝나고 말거라고 상기시키는 모든 비관주의자를 벽에다 밀어붙이고 위협했다. 그렇게 비관주의자들은 조롱당하고 때로는 벽에 밀쳐졌다. 그리고 낙관주의자들은 다가올 위대한 시대를 축하하며 환성을 내질렀다. 그렇게 몇 년 동안은 전쟁에서 승리했다. 온 국민이 철저하게 지칠 때까지 환호하고 기뻐하면서 피곤한 승리를 계속해갔다. 그러다가 돌연 붕괴하고 말았다. 이제 그들은 옛날 그토록 비난했던 비관주의자들의 위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한테서 계속 살아나갈 용기를 얻어야만 했다. 나는 그 체험을 절대 잊을 수 없다.

     우리 같은 비관주의자들도 우리가 사는 시대를 그저 불평만 하고 나쁘게 평가하고 비웃기만 할 권리는 없다. 사람들은 우리를 현대의 낭만주의자들이라고 부른다. 그 말에 물론 우호적인 뜻이 담겨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우리 같은 정신적인 사람들도 결국 이 시대의 한 부분이 아닌가. 따라서 우리도 우리의 이름으로 말할 권리가 있지 않은가. p.60

     

     

    4. ‘작은 기쁨’을 누리는 능력은 절제하는 습관에서 나온다. 이런 능력은 원래 누구나 타고났으나 현대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많이 왜곡되고 잃어버린 채 산다. 그것은 다름 아닌 얼마간의 유쾌함, 사랑, 그리고 서정성 같은 것들이다. 이런 작은 기쁨은 이른바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어진 것으로 눈에 띄지도 않고 일상생활 속에 흔하게 흩어져 있어서 일에만 열중하는 수많은 사람의 둔한 감성으로는 거의 느끼지 못한다. 그것들은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찬사를 받지도 못하며, 돈도 들지 않는다!(그런데 이상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조차도 가장 아름다운 기쁨은 전혀 돈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p.71

     

     

    5. <구름 낀 하늘>

    바위틈에 조그마한 난쟁이 풀이 피어 있다. 나는 몇 시간 전부터 누워서 작은 구름조각들이 천천히 어지럽게 흩어지며 저녁 하늘을 덮고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저 위에서는 분명 바람이 불고 있겠지만 여기서는 전혀 느낄 수가 없다. 바람은 가느다란 구름조각들을 실 가닥처럼 흐트러뜨리고 있다.

     물이 수증기가 되어 증발하고 또다시 비가 되어 땅 위로 리듬을 타고 다시 흘러내리듯이, 계절이 정해진 때에 따라 변하고, 밀물과 썰물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 교차하듯이, 우리의 내면에 있는 모든 것도 정해진 법칙과 리듬에 따라 생성된다. 플리스라는 교수는 인생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순열로 계산했다. 그것은 《카발라》의 신비로운 내용처럼 들리지만 추측건대 카발라도 역시 과학일지 모른다.

     내가 두려워하는 내 삶 속의 어두운 파도도 역시 일정한 규칙을 갖고 다가오곤 한다. 나는 날짜도 숫자도 알지 못한다. 나는 한 번도 지속적으로 일기를 써본 적이 없다. 나는 23이나 27이라는 숫자, 혹은 다른 어떤 숫자가 그와 관련이 있는지 알지 못하며 또 알고 싶지도 않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이따금 내 영혼 속에서 아무런 외적 원인 없이도 어두운 파도가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치 어두운 구름처럼 이 세상 위에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기쁨은 진짜가 아닌 것처럼 들리고, 음악은 김이 빠진 것처럼 맥없이 들린다. 우울한 마음에 짓눌리다 보면, 죽는 게 사는 것보다 더 나아보이기도 한다. 때때로 이런 우울한 기분이 발작처럼 찾아오지만, 어떤 간격을 두고 찾아오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나의 하늘 위에는 서서히 구름이 덮여가고 있다. 그것은 마음속 불안에서 시작되고, 두려움의 예감에서 시작되며, 어쩌면 밤에 꾸는 꿈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평소에 마음에 들었던 사람들, 집들, 색깔 그리고 소리들이 의심스러워지고 잘못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음악 소리는 머리를 아프게 한다. 어떤 편지를 받아도 기분이 안 좋고, 그 안에 뭔가 신랄한 내용이 감춰져 있을 것 같다. 이럴 때 사람들과 억지로 대화를 나누는 것은 고통이고, 결국 피할 수 없는 말다툼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총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아쉬워한다. 모든 것에 맞서 분노와 고통과 불만이 일어난다. 인간, 동물, 궂은 날씨, 신, 읽고 있는 책의 종이, 입고 있는 옷의 재질에 대해서까지 불만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분노와 초조함, 불만, 증오는 사물들에게로 향하지 않고 나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증오해야 할 대상은 바로 나다. 불협화음과 불쾌함을 세상에 끌어들인 것은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나는 오늘 그런 날을 보낸 후 쉬고 있다. 이제는 한동안 휴식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세상은 때때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며, 색채는 더 부드럽게 느껴지고, 공기는 더 감미롭게 흐르고, 햇살은 더 부드럽게 움직이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삶을 참아낼 수 없을 것 같은 날에는 그 값을 치러야 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노래를 부르고, 경건하게 행동하고, 술을 마시고, 곡을 연주하고, 시를 쓰고, 방랑하는 것이다.

     은둔자가 간단한 경전을 읽으며 사는 것처럼, 나는 이런 것들을 수단으로 해서 살아간다. 이따금 나는 저울의 추가 기울어서 힘든 시간을 감당하기에는 좋은 시간이 너무나 드문 것처럼 느껴진다. 때로는 그 반대로, 내가 발전해서 좋은 시간이 늘고 힘든 시간을 줄어든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가장 힘든 시간에도 절대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은 좋은 것과 나쁜 것 사이의 중간, 미지근하게 참아내는 중간 상태이다. 아니, 그보다는 차라리 굴곡이 심한 것이 낫다. 차라리 더 극심한 고통을 겪는 것이 낫다. 그 대가로 행복을 느끼는 순간들은 더욱 빛나게 될 테니까!

    불쾌한 것이 서서히 사라지고, 삶은 다시 아름다워지고, 하늘은 다시 화창해지며, 방랑하는 일도 다시 의미가 있어진다. 그렇게 삶이 되돌아오는 날이면 나는 뭔가 치유되고 있음을 느낀다. 사실 고통이 없는데도 피로하고, 굴복하면서도 씁쓸함은 없고, 자신을 경멸하지 않고도 고마움을 느끼는 것이다. 서서히 삶의 노선이 다시 상승하기 시작한다. 다시 노랫가락을 흥얼거리고, 다시 꽃을 꺾는다. 또다시 산책용 단장을 흔들면서 장난을 친다. 여전히 나는 살아가고 있다. 다시 어려움을 극복한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또다시 극복할 것이다. 아마도 더 자주 극복할 것이다.

     구름이 낀 채 수많은 가닥으로 나뉘어 조용히 자신 속에서 움직이는 하늘이 내 마음속에 미치거나, 또는 반대로 하늘에서 내 마음의 형상을 읽어낼 수 있을지는 도저히 알 수 없다. 때때로 그 모든 것은 불확실해 보인다! 어떤 날에는 오래되고 신경이 예민한 시인이자 방랑자의 감성을 가진 나보다 더 섬세하고 자세하고 충실하게 공기와 구름의 분위기, 색채의 울림, 향기와 습기의 움직임을 관찰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지상에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다가도 오늘 같은 날이면 나는 과연 무엇을 보고, 듣고, 냄새를 맡았는지, 내가 인지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내 내면의 삶이 밖으로 투영된 현상에 지나지 않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한다.

     힘든 시절에는 수동적으로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면서 자연에 몰두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 우리 같은 시인들은 무엇보다도 동시대의 사람들이 겪은 것들을 표현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들어서가 아니라 직접 체험해서 알게 될 때에만 할 수 있다. 그것이 격앙된 방식이나 감상적인 방식으로 표현되든, 아니면 우습거나 탄식하는 방식으로 표현되든 어떤 경우에라도 필요하며, 외롭게 어린아이의 걸음으로 발전해가는 인류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야 한다. 오늘 겪는 커다란 고통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과 모든 종류의 존재와 고통을 포용하는 연대감을 부여한다. 견디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pp.12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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