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헤르만 헤세, 여름> -헤르만 헤세-
    비소설/국외 2023. 11. 1. 11:34

     

     

    1.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다. 나는 혼자지만, 혼자 있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다.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햇볕에 푹 익을 용의가 있다. 나는 숙성되기를 갈망한다. 죽을 용의도 있고, 다시 태어날 용의도 있다. 세상은 그 이후로 더 아름다워졌다.
    (『방랑』중에서, 1818~19년) p.26
     
    2. 나는 배낭을 나뭇가지에 걸고 입고 있던 옷들을 성급히 벗는다. 뜨겁게 달궈진 자갈 위에 맨발로 서니 발꿈치가 견디기 힘들다. 얕은 물속으로 발을 들여 놓으니 다기처럼 따스하다. 먼저 물밖에 몸을 내밀고 수영을 하니 약간 서늘함이 느껴진다. 나는 더 깊이 물속의 검푸른 심연 속으로 몸을 넣었다. 등을 물 위에 대고 오랫동안 떠 있었다. 파도가 변덕스럽게 내 눈과 입 위로 철썩 철썩 스쳐가지만, 바람은 서늘하게, 천천히 나직한 소리를 내면서 불어와 숨 쉬는 내 피부에서 열기를 빨아들이고 있다. 나는 진정이 되어 물에서 나와 잠시 옅은 호숫가의 물위에서 뒹굴다가 훌쩍 뛰어 올라 태양 아래서 타오르는 모래 위에 몸을 던진다. 한 번 더 더워지고 다시 한 번 유희를 즐기려고 오랫동안 죽은 듯이 누워 있다. 두세 번 그렇게 즐기면서 내 몸을 그을렸다가 다시 시원하게 만들곤 한다. 삶의 온갖 열정, 온갖 고난과 온갖 매력이 이 유희 속에 반영되고, 달리다가 쉬는 것, 타오르다가 꺼지는 것, 미친 듯 질주하다가 느슨해지는 것, 그 모든 것이 반영되고 있다. p.145
     
     
    3. 여러 가지 색깔의 백일홍 십여 송이가 처음 잘렸을 때처럼 건강하고 찬란하게 빛나는 꽃은 꽃의 세계에서는 없습니다. 그것은 빛을 받아 현란해지고 색채로 외치는 듯합니다. 종종 순진한 시골 아가씨들이 일요일에 입는 의상 색처럼 보일 수도 있는 눈부시게 밝은 노란색과 오렌지색, 타오르는 붉은 색, 그리고 가장 경이로운 붉은 자색, 이런 색들을 마음 내키는 대로 나란히 놓거나 서로 섞을 수도 있는데, 언제나 그것들은 아름다우며, 언제나 그냥 격정적으로 빛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받아주어 이웃이 되고, 서로를 자극하여 상승작용을 하기도 합니다.
     사실 내가 당신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것도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나는 마치 백일홍의 발견자인 것처럼 자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이 꽃들과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당신에게 알리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야 말로 오래 전부터 나를 엄습해 온 가장 기분 좋고 몸에 좋은 감정들 중 하나이기 대문이지요. 그리고 이 사랑은 어쩌면 좀 연로해져서 타오르는 것일지 몰라도, 이 꽃들이 시들 때에 조금이라도 약해지는 것은 사랑은 결코 아닙니다! 꽃병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서 죽어가는 백일홍을 보면서 나는 죽음의 춤을 체험합니다. 절반은 슬프고, 절반은 무상함에 대해 유쾌하게 동의하는 것입니다. 무상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이고, 죽어가는 것 자체는 너무나 아름답고, 진정으로 피어나는 것이고, 너무나 사랑스러운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pp.165-166
     
     
    4. 어제 밤에는 숲속 주점에서 집으로 가는 길에, 거기 성(聖) 아본디오 묘지로 향하는 골짜기 입구에서 초원과 호수 골짜기의 축축한 냉기가 얼마나 나를 엄습했는지 모른다! 기분 좋은 숲의 온기는 밀려나 아카시아나무, 밤나무, 오리나무 밑에 수줍은 듯이 웅크리고 있었다! 여름이 필연적인 죽음에 저항하였듯이, 숲은 가을에 맞서 저항하고 있었다! 인간도 그렇게, 자신의 여름이 가라앉을 때면 시듦과 죽음에 맞서, 세계에서 스며들어 오는 냉기에 맞서, 혈관으로 밀려드는 냉기에 맞서 저항한다. 그리고 새로운 애정을 가지고 삶의 조그마한 유희들과 음향에, 그 표면에 존재하는 소중한 수많은 아름다움에, 정겨운 생체에, 휙 스쳐가는 구름들의 그림자에 몰두한다. 미소를 지으면서도 불안한 채 덧없는 것에 집착하고, 거기에서 불안을 만들어 내고, 위안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몸을 떨면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기술을 배운다. pp.184-185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