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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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조가 놓인 방> -이승우-소설/국내 2023. 11. 14. 10:49
1. 당신은 그런 사람이다. 자기 합리화가 없이는 여간해서는 움직이지 않는다. 스스로 명분을 만들어서 자신을 설득시키고 난 후에야 행동한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설득의 과정이 아니라 속이기의 과정인 경우가 더 많다. 당신은 스스로 만든 합리화의 술책에 넘어가지 않을 만큼 현명하지만, 그러나 현명함을 뒤로 감추고 기꺼이 그 술책에 넘어가줄 만큼 교활하기도 하다. 명분을 확보한 당신은 더 이상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pp.15-16 2. 사랑이 시들해지면 세상이 조금씩 넓어지고,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점점 더 잘 보이고, 그리고 결국 한때 유일한 인류였던 그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다. 기웃거리기가 가능해지는 것은 기웃거릴 대상이 다시 생겨났다는 증거다. 만물이 그런 것처럼 사랑 역시 태어나고 성장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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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 -이승우-소설/국내 2023. 11. 10. 13:11
1. 시간은 있던 것을 없게 한다. 무화(無花)에의 권능. 2. 나무를 깎을 때는 나무를 깎는 일만 중요했고 구멍을 뚫을 때는 구멍을 뚫는 일만 중요했다. 몰입하는 자의 세계에서는 부분이 전부였다. p.36 3. 그들은 아버지가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생활의 궁핍과 욕망의 억제를 견딜 수 있었다. 아버지는 꿈의 자본이고 욕망의 설계도였다. 아버지 안에 그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그들 앞에 나타나기 전에 아버지는 위대했다.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위대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들 앞에 나타났고, 그들 앞에 나타난 아버지는 초라했고 볼품없었고, 부상을 입은 패잔병 같았고, 조금도 위대하지 않았고, 그러므로 그들은 말을 잃어버렸다. p.74 4. 각설하고, 상상 속에서, 꿈속에서, 소설 속에서 말고, 사람을 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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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일기> -이승우-소설/국내 2023. 11. 10. 12:35
1.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는 코린트의 왕 시시포스의 교훈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 않나. 자꾸만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되풀이해서 밀어 올려야 하는 그 형벌이 무서운 것은 육체적으로 힘들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복이 굴욕과 권태를 선물하기 때문이지. p.110 2. 색안경은 간파당하지 않고 간파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이지. p.111 3. 그러니까 타인과의 삶을 상정하는 윤리의식이라고 하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개인의 이기심에서 발원하고, 또 그것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개인의 모든 윤리적 활동의 동기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이기심일 뿐이라는 주장도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다. p.132 4. 마음이 불편할 때는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신경인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