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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비소설/국내 2023. 11. 6. 11:10
1.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p.9
2. 최고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을 사는 것이리라. (...) 결국 최고의 삶이란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뜻이다. 겨울의 달리기는 정말 대단하다. 그건 달리기가 아니라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름의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폭염 속을 달리고 있으면 뜨거운 바람 때문에 숨이 막힌다. 하지만 여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달리기란 뜨거운 햇살과 서늘한 그늘을 번갈아 가며 지나가는 달리기다. 30도가 넘는 낮에 달린 일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두 달만 지나도 이제 그런 달리기를 하긴 어려워질 텐데. 최고의 달리기를 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 쉬운 일이다. 그렇다면 최고의 삶도 마찬가지다. p.31
3. 기쁨이든 슬픔이든 우리는 삶의 순간순간을 한 번만 경험한다. 추억으로 그 순간을 여러 번 되새길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강렬함은 점점 줄어든다. 아무리 사진을 찍고 일기를 쓰고 비디오로 쵤영해도 한 번 지나간 뒤의 일들은 더 이상 내 감각의 대상이 아니다. 그래서 이 삶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을 지금 이 순간에 경험하는 일을 배워야만 한다. 내 인생이 저마다 다른 나날들로 이뤄진 까닭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날마다 익혀야만 한다. p.40
4. 휴식이란 내가 사는 세계가 어떤 곳인지 경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바쁜 와중에 잠시 시간을 내서 쉴 때마다 나는 깨닫는다. 나를 둘러싼 반경 10미터 정도, 이게 바로 내가 사는 세계의 전부구나. 어쩌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몇 명, 혹은 좋아하는 물건들 몇 개. 물론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지만, 잠깐 시간을 내어서 가만히 앉아 있으면 세계가 그렇게 넓을 이유도, 또 할 일이 그렇게 많을 까닭도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다. 그렇다면 나는 정말 잘 쉰 셈이다. pp.53-54
5. 두 번째로 달린다면 아마도 고통보다는 다른 것들을 더 많이 생각하고 관찰하고 경험할 것이다. 그걸 아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고통에게 끌려가지 않는다. 그러나 한 번 더 달리면 그 정도로 집중해야만 하는 고통은 많지 않다는 걸, 사실 고통이란 내가 얼마나 많이 달렸는가를 알려 주는 신호에 불과하다는 걸 알게 된다. 고통은 우리의 자원을 완전히 점유하고서는 모든 게 소진될 때까지 빨아들인다. 고통이 생기면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해 진다.
달리기의 고통이란 앞면은 거울이고 뒷면은 유리로 된 이중창 같은 것이라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달릴 때는 정말이지 죽을 것 같았는데, 달리고 나면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 매번 그렇다. 그럴 때면 늘 고통의 순간은 전혀 기억나지 않아서 놀란다. p.142
6. 달리기에서 스트레스란 실제적인 것이다. 숨이 차서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다든가, 무릎이 아파서 달릴 수 없다든가, 힘이 다 빠져 당장이라도 바닥에 쓰러지고 싶을 때 스트레스가 생긴다. 그 스트레스는 당장 달리기를 멈추거나, 오랜 기간에 걸쳐서 연습을 하면 사라진다. 실제적인 것이니까 나타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하지만 내일 아침에 일어나 달릴 일을 생각해서 벌써부터 골치가 아프게 될 때 받는 스트레스는 원래 없는 스트레스다. 그래서 그런 스트레스는 결코 없앨 수도 없다. 원래 없는 걸 어떻게 없애나? p.149
7. 행복과 기쁨은 이 순간 그것을 원하는 사람에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즉각적으로 찾아오는 것이다. 우리를 기다리는 행복과 기쁨이란 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겨울에 눈이 내린다면, 그날은 행운의 날이다. 내일의 달리기 따위는 잊어버리고 떨어지는 눈이나 실컷 맞도록 하자. p.150
8. 그럼에도 자주 우주는 내 소원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어쩌면 우리가 소원을 말하는 방식이 잘못됐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정말 사랑한다면, 결혼이 아니라 아낌없이 사랑할 수 있기를 원해야만 할 것이다. 결혼은 어려울 수 있지만, 아낌없이 사랑하는 건 크게 어렵지 않다. 그건 내 쪽에 달린 문제니까. 마찬가지로 마라톤 완주가 아니라 매일 달리기를 원해야만 한다. 마라톤을 완주하느냐, 실패하느냐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매일 달리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다.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때가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을 매일 할 때, 우주는 우리를 돕는다. p.205
9. GTD라는 건 ‘Get Things Done’의 준말인데, 우리말로 의역하자면 ‘일단 끝내기’가 되겠다. 목표고 계획이고 다 필요 없고, 일단 끝내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취지에서 비롯됐다. 만약 단박에 끝낼 수 없다면 일을 잘게 쪼개서라도 시작한 일은 끝낸다. (...) 중간에 포기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만약 포기할 것 같으면 계획을 수정한다. 5분 달리기. 이것도 힘들 것 같으면 5분 걷기부터 시작한다. 어떤 계획이든, 시작한 것은 반드시 끝낸다. 그렇게 습관을 들이다 보면 역시 나중에는 제 버릇 못 버리고 일단 뛰기 시작했다는 이유만으로 42,195킬로미터도 기어이 완주하는 일이 벌어지는 것이다. pp.206-207
10. 절망을 좋아하는 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가 고통과 슬픔을 참아 내는 것은 오직 인간으로서의 관용 덕택이다. 그렇지만 삶은 고급 예술이다. p.229
11. 내가 지금 이 순간 일어나는 일들에 귀를 기울이고 냄새를 맡고 형태와 색을 바라볼 수 있다면,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할 수 있다면, 두려움과 공포와 절망과 좌절이 지금 이 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걸. 내 절망과 좌절은 과거에 있거나, 두려움과 공포는 미래에 있다는 걸. 지금 이 순간에는 오직 지금 이 순간의 감각적 세계뿐이라는 걸. p.251
12. 생각하는 대로 모든 게 바뀌는구나. 흥분하면 심장은 빨리 뛰고, 발걸음도 빨라지고, ‘괜찮아, 별일 아니야’라고 생각하면 또 모든 게 달라지고. p.256
13. 그러므로 우리는 더 많은 공기를, 더 많은 바람을, 더 많은 서늘함을 요구해야만 한다. 잊을 수 없도록 지금 이 순간을 더 많이 지켜보고 더 많이 귀를 기울이고 더 많이 맛보아야만 한다. (...) 지금 이 순간, 당신의 심장이 뛰고 있다면, 그건 당신이 살아 있다는 뜻이다. 그 삶을 마음껏 누리는 게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의무이고 우리가 누려야 할 권리이다. 우리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p.297'비소설 > 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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