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병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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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소설/국내 2023. 12. 7. 11:16
1.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2.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3. “보편적인 삶은, 아니 그냥 삶은, 어떤 것입니까.” (...) 데어버리도록 뜨겁고 질척거리며 비릿한 데다,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도 어느 결에 손쉽게 부서져버리는 그 무엇. 4. 어차피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해야 할 일만 하더라도, 사람은 살아 있는 이상 돈을 쓰게 된다. 숨만 쉬면서 살아도 비용이 든다. 숨을 쉬는 일, 입을 여는 일 자체가 극도의 무게를 동반하는 것이다. 자신 이외의 한 사람 이상과 관계를 맺고 산다면 감당해야 할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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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소설/국내 2023. 11. 20. 12:57
1. 거기에는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좀 이따 하교할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났다. 문득 다시 펼쳐보지 않을 책들의 일렬로 늘어선 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방을 나섰다. 돌보아야 할 남편과 아이들, 엄마 아빠 동생까지 있는데 유일하게 나한테 없는 건 아내였다....... p.38 2. 물론 밥과 빨래와 청소를 했고 자신을 목둘레가 늘어난 임부복만 걸친 채 이완이 밖에 입고 나갈 셔츠와 바지를 다리는 한편 부족하거나 소진된 살림을 채웠으며, 서울에 돌아가서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십원 단위까지 가계의 모난 부분을 두드려 맞추는 데 촉을 세웠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노동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들이는 모습만 보였고, 외간남자와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기는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