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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
    소설/국내 2023. 11. 20. 12:57

     

     

    1. 거기에는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좀 이따 하교할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났다. 문득 다시 펼쳐보지 않을 책들의 일렬로 늘어선 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방을 나섰다. 돌보아야 할 남편과 아이들, 엄마 아빠 동생까지 있는데 유일하게 나한테 없는 건 아내였다....... p.38
     
    2. 물론 밥과 빨래와 청소를 했고 자신을 목둘레가 늘어난 임부복만 걸친 채 이완이 밖에 입고 나갈 셔츠와 바지를 다리는 한편 부족하거나 소진된 살림을 채웠으며, 서울에 돌아가서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십원 단위까지 가계의 모난 부분을 두드려 맞추는 데 촉을 세웠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노동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들이는 모습만 보였고, 외간남자와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기는 장면만 포착되었다. p.77
     
    3. 환멸과 친밀은 언제라도 뒤집을 수 있는 값싼 동전의 양면이었고, 이쪽의 패를 까거나 내장을 꺼내 보이지 않은 채 타인에게서 절대적 믿음과 존경과 호감을 얻어낼 방법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p.85
     
    4. 사람이 대체로 큰 희생의 결과로 위대해지곤 하지만, 그걸 치르겠다고 결심하는 순간에는 의외로 작고 평범하며 개인적인 이유가 작용하기도 한답니다. p.182
     
    5. 그래야 사람들이 희생자의 꽃다운 나이와 펼치지 못한 아까운 인생에 대해 보다 즉각적이고 생리적인 반응을 보이며 대형 사고 및 재난에 경각심을 가지게 될 터. 그것이 떠난 이들의 영혼이 이 지상에서 수행하는 마지막 역할이다. 이때 그들이 인간이기에 풍길 수밖에 없는 냄새를 지우고 가능한 한 최고 수준의 전인이자 인격체로서의 흔적만 남겨야 할 터. 무조건적 애도를 받아 마땅한 위치에 그들의 이름을 올려 클릭 한 번을 유도하는 것이야말로 미디어의 본분. 분명 사실도 있고 진실도 있는데 그중 쓸 만한 화소의 조합으로 인해 원래의 발화와 뉘앙스와는 사뭇 다르게 번역되는 진술들. 한때 내가 했던, 지금도 남들의 이야기를 받아 적고 다듬을 때 종종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인데 이때 숭배할 만한 대상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좋은 서사적 전략이며, 나이가 어릴수록 여성일수록 미모가 뛰어날수록 그 대상으로 등극할 가능성은 무한등비수열로 높아진다. 그와 함께 당초의 사건에서 가장 중요도 높게 다루어졌어야 할 본질들-고령 버스기사의 근무 교대 문제, 일 년 단위 건강검진 의무화 및 버스 노후 점검 문제 등-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다. pp.207-208
     
    6. 애당초 그것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말자.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 말자. 그리하여 처음부터 모든 것의 무의미만을 남겨놓은 채 그 무엇도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버리자. 이름을 제거하거나 바꾸는 것은 의미에서 해방되는 간결하면서도 효율적인 수단이며, 의미의 소멸이야말로 가장 안전한 탈출의 방식이다. p.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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