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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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이 오기 전에> -마르셀 프루스트-소설/국외 2023. 12. 26. 14:49
1. 우리 영혼의 모습은 하늘만큼이나 시시각각 바뀐다. 우리의 불행한 삶은 그것이 감히 닻을 내리기를 두려워하는 관능미의 바다와 정박하기에는 벅찬 정숙함의 항구 사이에서 정처 없이 표류한다. p.85 2. 우리는 우리의 즐거움을 선택하면서 동시에 고통을 스스로 결정합니다. 고통은 즐거움의 이면에 불과하기 때문이죠. 만약 즐거움이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했다면 질투도 몰랐을 겁니다. 질투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여인이 다른 이와 나누는 즐거움을 상상하는 것이기 때문이죠. pp.108-109 3. 이제 정원은 흙탕물로 뒤덮인 황폐해진 들판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5시경 마침내 모두 안정을 찾자 정원은 자신을 덮은 물이 고요해지고 맑아졌으며 형용할 수 없는 황홀감에 빠진 것을 느꼈다. 분홍과 파랑의, 숭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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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기고 앉아씁니다> -아사이 료-비소설/국외 2023. 11. 29. 10:27
1. 내가 아주 좋아하는 소설인 요시나 슈이치의 「요노스케 이야기」에는, 나가사키에서 막 상경한 사랑스러운 대학생 요노스케가 이웃으로부터 “빈틈이 있다”고 평가받는 장면이 나온다. 말만 갖고 보면 부정적인 평가 같지만, 그것은 결코 얼간이나 멍청이라고 하는 게 아니었다. 실제로 이야기 종반에 그 이웃은 도쿄 생활에 익숙해진 요노스케에게 “어딘지 빈틈이 없어졌군”하고 말하며 서운해한다. 그 장면을 읽었을 때의 나는 이미 상경한 지 몇 년 되어 세상물정 모르는 젊은이 특유의 빈틈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낯선 동네의 낯선 누군가를 의심하고 경계하며 사는 기술이 몸에 익어 버렸다. 결국 낯선 동네의 낯선 누군가가 말을 걸어오는 횟수가 뚝 줄어들고 만 것이다. pp.21-22 2. 애초에 서프라이즈란 0에서 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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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프라이의 그리스 신화> -스티븐 프라이-비소설/국외 2023. 11. 29. 10:00
1. ‘사실들의 총체’, 우리가 ‘우주’라 부를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그리스어는 ‘코스모스’다. 지금 이 순간(‘순간’은 시간과 관련된 단어이므로 지금 당장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지금 당장’이라는 표현도 마찬가지다) 코스모스는 카오스이며, 카오스일 뿐이다. 왜냐하면 카오스만이 유일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오케스트라가 기지개를 켜고 악기를 조율하고 있을 뿐... 하지만 이제 곧 변화가 일어날 참이다. p.19 2. 에레보스와 닉스는 죽은 자들을 저승으로 실어 나르는 나룻배 사공으로 악명을 떨칠 카론도 낳았다. 잠을 의인화한 신 힙노스 역시 그들의 자식이었다. 그들은 꿈을 만들어 잠으로 가져가는 수천 명의 오네이로이의 부모이기도 했다. 오네이로이 중에는 악몽의 신 포베토르와 꿈속에서 기상천외한 방식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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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책은 없는데요> -젠 캠벨-비소설/국외 2023. 11. 14. 10:44
1. (손님이 서가에서 책을 한 권 꺼내 읽는다. 그러다 페이지 귀퉁이를 삼각형으로 접더니 다시 서가에 꽂아둔다) 직원 : 손님, 지금 뭐 하시는 건가요? 손님 : 방금 이 책 1장까지 읽었는데 마저 읽으면 친구와의 점심 약속에 늦게 돼서요. 그래서 이렇게 표시해놓고 내일 다시 와서 마저 읽으려고요. p.48 2. 남자 : 안녕하세요. 제가 이번에 제 그림책을 자비 출판했습니다. 친구들은 전부 제가 이 시대의 반 고흐가 될 것이 틀림없다고 하던데요. 제 책을 예약 주문하실 생각 없습니까? 몇 권이 필요하세요? 직원 : 아시겠지만, 반 고흐는 생전에 한 번도 대중의 인정을 받지 못한 작가가 아닌가요? p.56 3. 손님 : 부자들의 돈을 훔치는 책 있잖아요. 『로빈 후드』. 그 책 있나요? 우리 남편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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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읽는 변호사> -양재열-비소설/국내 2023. 10. 27. 10:43
1. 법과 관련된 일을 누군가 다 알아서 해주는 것을 역사적으로는 직권주의라 불렀다. 권위를 가진 누군가가 높은 단상 위에서 굽어 보며 진실을 파헤쳐주는 것이다. 반대로 재판의 중심이 당사자로 옮겨진 현재의 재판을 변론주의라고 부른다. 재판의 이해 관계자들이 직접 원하는 바를 주장하고, 증명한다. p.59 2.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래도 모르겠다면 표준 계약서를 활용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장 그럴듯해 보이는 표준 계약서를 찾아 마지막에 특약사항을 덧붙이면 된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필요한 항목들을 정확하게 적는다. 맨 마지막에 원래 계약서 내용과 특약사항이 맞지 않는다면 특약사항에 우선적인 효력을 준다고 쓴다. 그렇게 계약서를 작성하면 특약의 내용이 가장 우선하고, 다음으로 표준 계약서에 쓰여 있는 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