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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김연수-
    소설/국내 2023. 11. 6. 10:41

     

     

     

    1. 내가 쓰려고 하는 책은 인간의 권력의지와 인간의 이성은 결코 같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분열되어 있으며, 갖가지 가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장 훌륭하다는 이성 역시 한 개가 아니며 수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인간의 퍼스낼러티라는 말 그대로 온갖 종류의 가면이 비치되어 있는 분장실일 뿐이에요. 이 사실을 인식하여야만이 가면을 직접적으로 가리킬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권력의지라든가, 인간의 욕망을 삭제해 낼 도리가 없어요. 자신 역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해요. pp.29-30
     
    2. 결국 나의 존재라는 것은 유동하는 것일 뿐이다. 어떠한 진실도 내 몸 안에서는 살고 있지 않다. 내 몸은 텅 빈 동굴일 뿐이며 공허한 울림만이 메아리치고 있을 뿐이다. 주인은 그 곳을 나오면서 그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자신이 처음 전경의 발에 차이는 노인을 보았을 때, 그 분노는 아무런 힘이 없는 주관적인 분노였을 뿐이다. 내면은 혼란되어 있었고, 그 광경이란 그 혼란되어 있는 내면의 주관적인 투사였을 뿐이었다. 어쩌면 자신의 내면이 좀 더 질서 있게 자리잡혔더라면, 그 노인이 죽는 일까지는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명백한 객관적인 진실이란, 없다. p.57
     
    3. 프로정신이란 일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는 것이지, 결코 돈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는 것은 아니야. p.60
     
    4. 얘들에게 세계의 중심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어둠 속의 일들을 얘기하자면 얘들은 그것이 영화의 한 장면으로만 여기는 것이다. 모든 것이 그렇다. 6·25도 영화이고 4·19도 영화이다. 그것은 삶이 아닌 것이다. 아마 오래지 않아 5·18도 영화가 되고 6·10도 영화가 되면 이제 모든 진지한 삶은 액션 영화로 끝을 맺게 되는 것이다. p.70
     
    5. 햄릿의 대사 중 <사는 것, 죽는 것, 잠자는 것, 이 모두가 꿈일 뿐> (...). p.71
     
    6. 쇼비니즘(chauvinism) : 맹목적·광신적·호전적 애국주의 p.121
     
    7. 알레고리(Allegory) : 그리스어 ‘다른(allos)’과 ‘말하기(agoreuo)’라는 단어가 합성되어 만들어진 ‘알레고리아(allegoria)’의 영어식 표현. 고대로부터 내려온 수사법의 하나로, 말하고자 하는 바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것에 빗대어 설명하는 방식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추상적인 개념을 전달하기 위해 이를 구체화할 만한 적합한 대상이나 상황을 대신 제시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솝 우화’가 알레고리의 쉬운 예라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수사의 한 갈래로 전해진 알레고리가 미술의 영역에서도 주요한 표현 방식으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르네상스 이래 고대 시인과 같은 높은 사회적 지위를 소망해온 많은 미술가들은 마치 시에서처럼 상징과 암시를 매개하는 알레고리를 작품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p.129
     
    8. (...) 제발 그 젊고 아름다운 힘을 이미 다른 사람들도 다했던 세계 속으로의 편입이라는 측면에서 다루지 않았으면 좋겠어. 흔히 환상의 이야기들이 만들어 낸 용어인 <신세대>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거짓 담론이 아닌가? 60년 대생들을 지칭하는 신세대라는 것이 단지 환상일 뿐이라면, 자네들이 할 일은 그 신세대라는 환상을 좀 더 보완하고 강렬하게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신세대라는 개념을 혁파하고 좀 더 구체적이고 좀 더 건강한 새로운 글쓰기의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것이야. 신세대라는 말에 가장 가까운 의미를 지닌 세대들은 보수적인 성향으로 환상적인 세계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이 아니라, 혁명적인 생각을 가지고 구체적인 세계의 모든 것, 즉 변두리에서 중심까지를 모두 끌어안으면서 세계를 변화시켜 나가는 자들이라고 생각하네. pp.131-132
     
    9. 그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결국은 자신이 깔려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리는 아픔은 개인적인 아픔일 뿐이지만, 그만큼 바퀴가 더디게 감으로써 생기는 아픔은 우리 모두의 아픔이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두려운 일이다. 역사라는 것이 개인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p.174
     
    10. 늘 이렇게 배가 고프고 끼니를 거르는 삶이었을 뿐인데, 왜 나는 이러한 삶에 보람 같은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일까? 김종휘는 약간은 힘이 약해진 햇살을 맞으며 생각하였다. 자신의 선택을 회의하는 자가 가장 못난 놈이지. p.190
     
    11. 젊은이들은 한탕으로 떼돈벌기를 원하였고, 영화처럼 삶의 고통이 없는 욕망의 니르바나(=열반)를 원하였다. p.192
     
    12. 분명히 비이상적인 일이라 할지라도 반복되면 인간은 그 행동을 하게 된다. 이 사실이 군대에서 깨달은 민식의 바이러스에 대한 견해였다. 인간이란 반복의 노예일 따름이었다. 이것은 육체의 부분에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영역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다. 즉 조건반사에는 의식적인 조건반사도 존재하는 것이다. 저열한 이념이라도 반복되면 필경 먹혀들게 되어 있다. p.196
     
    13. (...) 환상이라는 것은 곧 환멸이야, 환멸. 자네는 학교 다닐 때, 무지개를 쫓아간 소년의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하였는가? 그 소년이 결국 움켜쥔 것은 백발이 성성한 자신의 모습과 아직도 산 너머에 있는 무지개였을 뿐이야. 그게 바로 환멸이란 말이야. p.234
     
    14. ‘사람들이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이라 여기는 데에서 추함이 나오고, 선을 선이라 여기는 데에서 악이 나온다.’ p.260
     
    15. 불목하니 : 지금은 사라진, 사찰에서 땔나무를 베고, 물을 긷는 사내 종노를 뜻한다. p.280
     
    16. 비로소 민식은 그가 이 보잘 것 없는 세계를 얼마나 사랑이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았는지를 알 수 있었다. 사랑이 없는 자에게 세계는 아주 단순해 보이는 것일 뿐, 사랑이 가득찬 눈으로 세계의 가장 미세한 것을 주시하는 자에게는 세계란 도저히 묘사할 수 없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민식은 비로소 모든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자신도 모르게 끼어든 이 세계라는 것을 움직이는 자들에게 얼마나 세계에 대한 사랑이 없는가를. 사랑이 없는 자들이 세계를 바라볼 때, 세계는 단순하게 무너지고 만다는 것을. p.333
     
    17. 그러니까 대안이 비판하는 것이 바로 자신이라는 것인데, 이것은 사람들이 쉽게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꾸만 남을 빗대어 자신을 조건 지으려고 하는데,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을 스스로 반성하는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자신을 극복하지 않을 때, 어떠한 대안도 없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예전에 미국 영화 터미네이터2를 보면서 아주 탄복한 적이 있었습니다. 인간을 파괴하는 테크놀로지로 상징되는 컴퓨터칩이 들어 있는 곳은 다름 아닌 주인공인 터미네이터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지구를 구하기 위해서 싸웠던 그 주인공이 결국 깨닫는 것은 자신 안에 악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가 하는 행동이 무엇입니까? 스스로 죽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끝장내는 것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입니다. p.350
     
    18. 그러므로 저는 저를 포함한 모든 저의 세대에게 자본주의를 체화하고 있는 자신을 반성하는 것, 자신을 죽이는 것으로 신세대로서의 가장 선진적인 예술을 하자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가면을 가리키는 행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데카르트가 가면을 가리키며 앞으로 나아간다고 말할 때에는 가면을 쓸 수밖에 없는 자신의 본 얼굴을 봐달라는 절규였습니다. 타인의 가면이 아니라, 자신의 가면을 가리킬 때 앞으로 나아가는 힘은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p.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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