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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일기> -이승우-소설/국내 2023. 11. 10. 12:35
1. 의미 없는 행동을 반복해야 하는 일이 얼마나 무서운 형벌인지는 코린트의 왕 시시포스의 교훈을 통해 잘 알려져 있지 않나. 자꾸만 굴러 떨어지는 바위를 되풀이해서 밀어 올려야 하는 그 형벌이 무서운 것은 육체적으로 힘들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복이 굴욕과 권태를 선물하기 때문이지. p.110
2. 색안경은 간파당하지 않고 간파하기 위한 훌륭한 도구이지. p.111
3. 그러니까 타인과의 삶을 상정하는 윤리의식이라고 하는 것 역시 넓은 의미에서 개인의 이기심에서 발원하고, 또 그것에 기여한다고 할 수 있다. 심지어 개인의 모든 윤리적 활동의 동기가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인 이기심일 뿐이라는 주장도 아주 터무니없지는 않다. p.132
4. 마음이 불편할 때는 목욕탕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갔다. 신경인지 근육인지가 나른하게 풀어지면서 마음이 평평해졌다. 더 불편할 때는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불렀다. 정신인지 몸인지가 빠르게 마비되면 나는 자유와 긍정의 세계로 잽싸게 도피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기만이고 연극일 뿐이었다. 막이 닫히면 배우는 무대 밖으로 걸어 나오게 되어 있다. 무대 밖의 현실은 배우의 연기를 가만히 지켜보며, 연기를 끝내고 내려와 다시 참여하는 순간을 잠잠히 기다린다. p.149
5. 의식의 주름진 틈새에 도사린 그것이 연민을 가장한 교활함이라는 걸 그 당장은 이해하지 못했다. 내 안의 이기심이 가면을 골라 쓰고 있다는 걸, 모든 이기심이 늘 가면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으면서도, 눈치 채지 못했다. 아니면, 눈치 채지 못한 척한 것인가. 그것 역시 가면, 그러니까 가면 위에 덧쓴 또 하나의 가면일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p.153
6. 그녀는 달랐겠지만 나는 그런 정도의 인간관계가 편했다. 내가 끔찍이 싫어하는 것이 애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마땅찮아하면서도 주말여행을 가거나 내키지 않는 영화를 하품을 하며 보거나 찻집에 앉아 멀거니 마주보다가 지루함을 덜기 위해 퍼즐 맞추기나 숨은그림찾기 같은 한심한 놀이를 하는 위인들이다. 내 눈에는 순전히 시간 때우기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짓을 하면서 그 바보들은 자기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보통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니다. 감정과 책임의 최소화, 그것이 내가 우정이든 애정이든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자신의 독립성을 잃지 않는 길이라고 내세우는 방법이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비인간적이고 이기적이라고 비난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p.195'소설 > 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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