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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E-Book -금정연-비소설/국내 2023. 10. 23. 10:42
1. 일상이 망가져서 자질구레한 일들을 방치하는 게 아니라 자질구레한 일들을 방치해서 일상이 망가진다는 사실 정도는 알아야 하는 나이가 된 탓이다. 침대에서 멀어지는 걸음걸음마다 나는 거듭해서 마음을 먹는다. 나이 먹는 것도 서러운데 마음까지 먹어야 하다니, 빌어먹을, 벌써부터 소화제를 찾고 싶어진다.
2. 다행히 나만 그런 건 아닌 모양이어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수면의 관계에 대한 임상실험 결과를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최근에 읽은 《소설가의 일》 프롤로그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김연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독한다’는 신년 계획을 세우고 매일 ‘자기 전에’ 10페이지를 읽겠다고 결심하지만 3월 4일까지 그가 읽은 건 고작 1권의 47페이지였다고 고백하며 이렇게 탄식한다. “빌어먹을 저녁식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그는 프루스트의 원고를 거절함으로써 문학사에 영원한 놀림거리로 남은 어느 편집자의 편지를 소개하기도 하는데, 꼭 내가 쓴 편지인 줄 알았다. “친애하는 동료여, 내가 아둔패기라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봐도, 주인공이 잠들기 전에 침대 위에서 뒤척이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서른 페이지나 필요한 이유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3. 오늘 처음으로 이 《섬》을 열어보게 되는 저 낯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장 그르니에, 《섬》 서문 중에서)
4. 겉으로 보기에는 얌전하고 별다른 돌발행동도 하지 않는 것 같지만 한여름이면 서로 몸을 바싹 붙이고 앉아 다른 놈들이 더워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즐기며 제 몸 더운 건 꾹 참는 짐승이 바로 양이다. 과연, 나는 생각한다. 나와 비슷한 구석이 있군.
5. “조금 비참한게 영혼에는 좋아요.”
6. 아니, 그만두자. 이런 식의 정리는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꼬장꼬장한 꼰대의 잔소리처럼 들릴 뿐이다. 어쩌면 그는 정말 꼰대인지도 모른다(꼬장꼬장한 건 확실하다). 그렇다고 그의 말을 단순한 잔소리로 치부할 수 있을까?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은 채 철저히 ‘독고다이’로 살아온 노작가의 인생론이다. 흔한 꼰대들과 비슷한 구석이 있을지언정, 같을 순 없단 말이다. 말이란 본디 흔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사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겐지의 말에는 공허한 꼰대들의 잔소리와는 달리 스스로 그것을 살아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박력이 있다.
따라서 문제는 인생이다. 살아가는 것이다. 겐지는 우리가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무엇에도 기대지 않은 채 고독 속에서, 불안도 두려움도 거리낌도 없이, 애당초 도리에 맞지 않는 삶을 마음껏 살아가야 한다고 말한다. 차라리 강요한다. 이쯤에서 눈치 채셨겠지만 그는 영락없는 마초이고 둘도 없는 개인주의자다. 물론 어설픈 꼰대들하고는 급이 다른, 삶 속에서 자신의 말을 철저히 따르는 근본주의자라고 해야겠지만. 그러니 당신의 인생을 돌아보아야만 할 것이다. 과연 당신이 살아낸 인생이 겐지의 단단한 말에 반박할 수 있는 종류의 것인지를 곰곰이 따져보아야만 할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이렇게 말하시기를.
“(겐지, 당신이 말하는)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거 참, 절묘한 제목이다.
7. 그의 가방에는 언제나 5.25에서 5.80달러의 비상금이 들어있는데, “현기증이 날 때 샌드위치를 사 먹기엔 충분하지만 할 일을 내팽개치고 영화를 보러 가기에는 부족한 액수”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과연 프로다.
8. 그리하여 연필 깎기의 기술은 삶의 기술이 된다. 연필 촉을 완벽하게 가다듬는 것조차 불가능한 게 평범한 우리들의 삶이다. 어디 그뿐인가. 깎으면 깎을수록 짧아지는 연필처럼, 더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수록 우리의 남은 시간은 점점 짧아질 뿐이다. 그것이 바로 향나무와 흑연의 쌉싸래한 연필밥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연필을 깎아야만 한다. 그럼에도 삶을 살아야만 한다.
9. 하지만 불안은 앎으로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그에게 W박사가 충고한다. 중요한 건 회복탄력성과 수용력이라고. 그것을 적절하게 사용하며 불안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라고.
10. 인내란 딱히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인내를 패배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진정한 패배가 시작되는 것이리라. 애당초 ‘희망’이란 이름도 그 정도 생각으로 붙인 것이다.'비소설 > 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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