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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가장의 근심> -문광훈-
    비소설/국내 2023. 12. 7. 13:43

     

     

    1. 누구와 싸우는 것도, 싸워서 이기는 일마저 부질없음을 나는 잘 안다. 삶에서 싸움이 없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런 자각 때문이었는지 생활 안팎의 갈등은 대체로 유야무야 어렵잖게 끝나지 않았나 싶다. 만약 싸워야 한다면, 나는 어느 한 명과 싸우는 게 아니라 그 전체와 싸운다고 생각하려 했고, 수십 수백 명보다 더한 궁극의 적수는 나 자신이라고 여기곤 했다. p.18

    2. 결국 한 인간은 다른 인간에 대해 거의 낯선 채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거의 낯선 채로 죽어 간다. 만인은 만인에 대해 이방인일 뿐이다(‘만인 대 만인의 투쟁’이란 것도 낯설기 때문에 서로 상처 입히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아마도 가장 사랑하는 사이에서조차, 사실은 전적으로 모르는 가운데 그저 몇 가지 ‘안다’는 착각 아래 잠시 부대끼다 제각각 떠나갈 뿐이다. p.25

    3. 진실을 말하고 선한 일을 행하며 아름다움을 잊지 않는 일도 끔찍한 헌신 없이는 불가능할 것이다. 몸을 바치는 이 선의 없이 우리는 우리 사는 여기에서 그 다음 이웃 마을로 갈 수 없을 것이다. 선의의 길이란 고통스런 과정이지만, 그러나 ‘어짊과 사랑(仁愛)’의 길이기도 하다. p.32

    4. 여기에서 핵심은 “자기 감정과 상황을 정당하게 보여주면서, 고마움을 표하되 비굴한 서운함은 표하지 않고, 주의하되 냉담하지 않으며, 정직하면서도 분노하지 않는 일”이다. 사람은 고마움을 표할 때면 “후회할 정도로 굽신거리게 되고(servile regret)”, “주의하면(be guarded)” 자주 “냉담(coldness)해지며”, 정직하면 쉽게 “분노(resentment)”하지 않는가? 수치스러운 상황 앞에서 후회나 냉담 혹은 분노를 삼가기란 어렵다. 하지만 더 어려운 일은 “감사를 표하되 비굴하게 서운해하지 않는 것”이고, “주의하되 냉담하지 않으며”, “정직하면서도 분노하지 않는 일”이다. p.44

    5. 단련되지 않은 자존감은 허영과 같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은 품위 있게 살아가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이런 행동에는 자존심뿐만 아니라 어떤 기율-책임과 의무가 더해지는지를 보여 주는 듯하다. 평온한 마음은 기율 없이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 기율로부터 자존감과 품위도 자라 나온다. p.53

    6. (...) 스스로 머리를 숙이는 일이 어떻게 타인으로 하여금 머리를 숙이게 하는지를 깨닫는다. 스스로 섬기지 않고는 섬겨질 수가 없다. p.63

    7. 문화는 그것이 매일의 생활 원리로 실행되고 확인될 수 있을 때, 비로소 깊은 의미에서 문화다워진다. 이때 문화의 의미는 어떤 목적 아래 행해지기보다는 각자의 행동 속에 이미 배어 있어서 하나의 관습(ethos)이 되어 있을 것이고, 이 관습으로부터 윤리(ethics)도 나올 것이다. 개인의 삶을 돌보고 키우는 것이야말로 ‘문화적으로 정당한’ 실천의 첫걸음이다. p.71

    8. 자유와 평등 같은 민주주의의 가치건, 정직이나 양심 같은 시민의 덕성이건, 이 모든 가치는 그들에게 요구할 것으로서가 아니라 우리가 먼저 육화해야 하고, 우리 이전에 내가 우선 체질화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문화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 인간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문화의 참된 진전이고, 시민사회의 실질적 발전이다. p.72

     

    9. 자기 감정에 충실할 때 사람은 좀 더 솔직해지고, 이 감정과 거리를 둘 때 좀 더 공정해진다. 그러므로 감정이란 충실해야 할 대상이면서 동시에 검증해야 할 대상이다. 검토된 감정은 더 맑고 투명해진다. 이 맑은 감성은 이성 가까이 있고, 이미 이성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성으로서의 감성은 자신을 비움으로써 세계의 전체에 다가선다. 그래서 ‘넓고 깊은 마음’이 된다. 넓고 깊은 마음은 인간성과 공동 감각 그리고 연대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그것은 보편적 이성이고, 보편으로 나아가는 이성이 된다. 보편적 이성은 스스로 투명해지고자 하기에 그 자체로 윤리적이다. p.87

    10. 절제된 감정·감성의 정련화는 합리적 사회와 공적 가치의 실현을 위해 우리 각자가 연마해야 할 하나의 근본적인 과제이지 않나 싶다. 사실 모든 교양 교육, 그리고 크게 보아 인문학의 문제도 이 ‘감정의 객관화’ 훈련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정직이나 양심, 선의와 책임 같은 시민적 덕목도 이 같은 훈련에서 비로소 얻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양’이나 ‘시민’ 같은 말은 곳곳의 탄식 앞에서 여전히 아득한 것처럼 보인다. pp.88-89

     

    11. ‘정의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정의롭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옳게 산다면, 또 옳게 살려고 스스로 노력한다면, 돈과 힘과 앎이 주어졌을 때에도 함부로 휘두르지 않을 것이다. p.114

     

    12. 책 읽기란 해석과 실천으로 구성된다. 실천이란 해석된 내용의 생활화·내면화 과정이다. 고전의 의미는 그 메시지가 고전을 읽은 나의 생활 속에서, 내가 내 삶을 살아가는 가운데 삶의 실질적 에너지가 됨으로써, 비로소 살아 있는 것이 된다. p.127

    13. 우리는 기억하면서 망각하고 망각하는 가운데 또 기억한다. 기억과 망각의 이 순환 밖에는 자연이 있다. 자연은 기억이나 망각도 없이 무심하게 있다. 마치 그 어떤 것도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이렇게 아무것이 없어도 되는 것처럼 그것은 끔찍한 무관심 속에서 차갑게 있다. 이 자연에 비한다면 사람은 얼마나 제 흔적에 집착하고, 얼마나 자신의 업적과 영광을 과시하려 하는가? 하지만 쉼 없이 흔들리고 어디론가 옮아가며 시시각각 흩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인간은 자연과 동질적이다. 인간은 잎과 바람과 흙과 안개의 일부일 뿐이다. 나는 떠나가는 이 모든 것들에 깊은 연민을 느낀다. p.134

    14. 아마도 가장으로서의 나의 근심은, 살아가는 한, 계속 될 것이다. 삶의 불확실성은 분명 나보다 오래갈 것이다. 그러니 나 역시 오드라덱처럼 가끔 공허한 웃음을 짓고, 나무토막처럼 할 말을 잊은채 살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다고 살아가는 기쁨, 여기 이 자리에서 숨 쉬면서 뭔가를 나누는 공존의 즐거움보다 그 근심이 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아이 키우는 두려움 역시 삶의 기쁨의 일부여야 마땅하다. 나날의 기쁨을 외면하지 않은 채 커가는 아이를 지켜보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믿고 기다리는 것, 그래서 결국 ‘태어나면서 하게 되어 있는 일’을 조금씩 실행해 가는 행복을 아이들이 누리게 할 것이다. p.174

    15. 하지만 인간은 운명적 굴레에 포박된 존재만은 아니다. 인간 실존의 선고는 삶의 한계에 대한 규정만큼이나 한계 초월에도 해당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쉼 없이 나아가야 한다. 쾌활 혹은 밝음은 이때 필요하다. 우리는 삶의 무게를 고요 속에서 조용히 받아들이고, 밝은 마음으로 그 너머를 향해 옮아가야 한다. 이렇게 옮아가면서 지금 여기의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향유는 ‘정당할’ 것이다. 헤겔이 그리스 비극을 분석하면서 “어떤 정당한 향유의 정신적 쾌활함”이라고 불렀던 것도 이런 상태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p.206

    16. 전체의 이념은 오직 이 전체를 이루는 개별적인 것에 대한 존중 속에서만 정당할 수 있다. 개체와 전체의 이런 얽힘을 의식하는 일 자체가 반성적 사고의 산물이고, 이 사고는 생각하는 개인으로부터 나온다. 과거에서 배울 수 없다면, 우리는 미래도 생각할 수 없다. 고통을 평화로 바꿀 수 없다면, 우리는 미래도 생각할 수 없다. 고통을 평화로 바꿀 수 없다면, 굴욕을 품위로 전환시킬 수 없다면, 미래는 인류에게 없는 것과 같다. p.299

    17. 삶을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내가 나로서 사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마음대로 산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내가 내 삶을 살면서 스스로 세운 원칙에 따라 자신을 만들어간다는 뜻이다. 그것은 달리 말해 ‘주체의 주체화(subjectivation of subject)’ 활동이다. 삶의 가치와 방향이 자신의 선택과 책임이 아닌 세평(世評)이나 유행에 따라 정해진다면, 그는 그 삶의 주인이 아니라 하수인이다. 그것은 ‘열심히’ 사는 삶일 수는 있지만, 불필요하게 바쁜 삶-껍데기로서의 삶이다. 삶에서 가장 큰 죄악은 자기의 삶을 책임 있는 개입 없이 아무렇게나 내버려두는 일일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인생의 방치이고 직무유기다. p.331

     

    18.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화나 신문·방송 혹은 인터넷에서 누구나 겪고 또 매일 볼 수 있듯이, 주로 ‘자기’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대개 나를 토로하고 주장한다. 그래서 감정적이라기보다는 감상적(感傷的-하찮은 일에도 쓸쓸하고 슬퍼져서 마음이 상함)이고, 논리적이라기보다는 격정적이다. p.564

    19. 사인화(私人化)된 개인을 내세우는 것은 자기선전의 욕구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시된 주체는 자기와 타자, 감성과 이성 사이에서 균형을 잡기 어렵다. 그래서 어느 한쪽으로 쉽게 기운다. 그의 언어가 편향되어 보이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p.564

    20. 우리 사회에는 가르치고 명령하고 지시하고 훈계하는 언어가 아직도 너무 많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일 겪고 있듯이, 칭찬하고 북돋기보다는 비난하고 질타하며, 허락하고 인내하기보다는 금지하고 원망하는 데 익숙하다. 우리 사회에 넘쳐 나는 것은 상대를 제압하려는 격한 정열이다. 이 정열은 공동체에 그 자체로 이롭기보다는 타인을 이겼다는 데서 행동의 의의를 찾는다. 아마도 오늘의 한국만큼 개인의 성향에 있어서나 사회적 분위기에 있어 격앙되고 충혈된 국가는 OECD에 없을 것이다. pp.565-566

    21. 즐거운 길은 선의를 북돋아 준다. “어짊을 행하는 것은 나로부터 오는 것이지, 남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공자) p.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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