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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법 안온한 날들> -남궁인-
    비소설/국내 2023. 12. 7. 14:05

     

     

    1. “자네는 나와 함께 오래 살았네. 감사했네, 여보. 당신. 나는 행복했네. 많은 사람 중에 자네와 평생을 함께해서, 나는 행운아였네. 그 행운이 60년도 넘었네. 그래서 나는 너무 운이 좋았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순간이 없다네. 이제 자네가 떠났으니 나는 오래 살지 못할 것일세. 대신 나는 자네가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걸 안다네. 먼저 가 있게. 좋은 곳이라고 들었네. 여기보다 평온한 곳이라고 들었네. 어떻게 우리가 같이 한날한시에 가겠네. 대신 자네가 먼저 간 것일세.” p.28

    2. 다시는 연락해서는 안 되고 이제는 만날 일도 없어야 하는 것까지 다 알아. 하지만 헤어졌다고 말할 수는 없어. 지금 내 상태로는 아직 헤어졌다고 할 수 없거든. 그냥 나는 혼자 지내. 그리고 헤어지고 있어. 아직 나는 그녀와 헤어지는 중이라고.“ p.52

    3. 숏커트와 아담한 체구를 마주하면 마음이 버릇처럼 반응했다. 마음에 물이 들어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고나 할까. p.60

    4. 독서는 한 달에 스무 권 정도로 정한다. 더 많이 읽으면 밀도가 낮은 독서가 되거나, 허튼 책을 고르게 된다. 충분히 시간을 두고 책을 즐기며 문장을 하나하나 음미한다. 오랜 습관대로, 어딘가 갈 때 꼭 인쇄된 활자를 들고 다닌다. 근본적으로 가리지 않고 쉬지 않고 읽는다. 책으로 만들어진 활자는 대체로 멍청하지 않고 경거망동하지 않으며, 신중하다. 떠드는 말이나 근본 없이 돌아다니는 글보다는 낫다. 한 권 정도는 영문으로 된 것을 읽도록 노력한다. 괴롭지만 보탬이 되는 습관이다. 읽고 나선 짧게라도 읽었음을 기록하는 서평을 쓰고 좋은 문장을 기록해둔다. 그 기록은 앞으로도 오랜 시간 자산이 된다. p.89

    5. '사랑(Amor)'의 라틴어 어원에는 쫓고 쫓기는 사람이라는 뜻이 있다. 고대부터, 쫓김을 당하는 일과 악의적인 행패와 증오를 받는 일도 사랑이었다는 것인가. p.139

    6. 싹은 어디에서든 피어난다. 그리고 척박한 곳에서 움튼 싹은, 오히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도 한다. 우리는 주저앉는 존재가 아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의 슬픔을 안고 당당하게, 당연하게 살아가고 있다. 병원을 나간 사람들은 시련을 극복하고 때로는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 것이다. 한참 고된 생활에 취한 나는 그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사람은 일방적으로 불행하지 않다. 서글한 한가족이 그날 그 당연한 사실을 새삼스레 내게 알려주었다. p.195

    7. “여러분은 이제 의사가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암도 치료하고 싶고, 혈압도, 당뇨도 치료하고 싶겠지요. 그렇게 사람들의 생명을 연장하는, 그게 멋있는 의사라고 생각할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은 기억해야 합니다. 전 인류의 최대 다수에게 고통을 주고 이들이 죽음으로 이르게 하는 건 그런 병이나 질환이 아닙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어서, 입을 것이 없어서, 살 곳이 없어서 인간들은 죽어갑니다. 그런 병이 있는지도 모르고 죽는단 말입니다. 의사는 생명을 연장하기에 앞서 인간을 돌보는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이 진단명을 일생 쓸 일이 없더라도, 이 세계에서 벌어지는 다수의 고통을 절대로 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여러분이 이 엄존하는 하나의 진단명을 마음속에 새기고 기억하는 일이, 복잡한 학문을 떠나 인간을 이해하는 한 명의 인간이 되기 위한 마음가짐이라고 믿습니다.” pp.198-199

    8. 죽음과 함께하는 이 공간이 늘 그렇게 슬픔이나 격정에 차 있지만은 않다. 많은 사람은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고, 순순히 남은 몫의 인생까지 살다 간다. 그러지 않으면 또 어떻게 하겠는가? 어차피 누구든 본질적으로 죽음에 항거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죽음을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결국은 호들갑스럽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그 슬픔으로 인해 이 세계는 온종일 마비될 것이다.

     죽음은 내가 있는 공간에서 순리대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것이 당신이 더 희망차게 혹은 더 절망적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가 되거나, 거꾸로 삶의 의미를 비추는 무엇인가 되지는 못한다. 죽음이 자신에게 오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먼저 지나치게 생각하는 것은 낭비다. pp.278-279

    9. 버스가 정차했다. 사람들이 가득 들어 있었다. 평범한 일상의 개수가 너무 많아 눈물이 났다. 나는 그 틈바구니에 들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 잠시 고개를 들고 눈을 감았다. 버스는 주행하며 덜컹거렸다. 머릿속이 아득한 공간으로 푹 꺼지는 느낌이었다. 버스는 무엇인가를 평범하게 밝아내며 나아가고 있었고, 사람들은 평범하게 같이 덜컹거리고 있었다. 평범한 차바퀴, 평범한 선량한, 평범한 슬픔, 그리고 평범하게 우리가 밝는 것들…… p.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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