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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 -요 네스뵈-
    소설/국외 2023. 12. 27. 13:24

     

     

    1. “당신이 그랬어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바보라서 돌에든 피부에든 아무것도 새기지 말고 수용성 물감만 써야 한다고. 그래야 과거를 지우고 과거의 자기를 잊을 수 있다고.”

     (...) “빈 페이지라고 했어요. 새로운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자유. 문신은 우리를 정의하고 낡은 가치관과 의견에 매달리게 한다면서. 당신이 가슴에 예수 문신을 새긴 걸 자주 예로 들었잖아요. 무신론자에게 예수 문신이 있는 게 터무니없어 보이니까 낡은 미신들에 매달리는 데 자극제가 되어준다면서.” p.401

     

    2. “그래. 네가 얼마나 알고 싶은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지.” 해리가 라켈한테 자주 하던 말이다. 그녀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적게 묻는 습관을 들였다. p.659

     

    3. 어릴 때 그가 노를 젓고 할아버지가 앞에 앉아 흐뭇하게 웃으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던 생각이 났다. 상체를 어떻게 써야 하고 팔을 똑바로 펴고 팔이 아니라 복근의 힘으로 노를 저으라고 말씀해주시던 기억. 가볍게 노를 저으며 억지로 힘주지 않고 리듬을 찾아야만 배가 순탄하게 물살을 가르며 적은 힘으로도 빠르게 나갈 수 있다던 말씀. 엉덩이로 벤치 중앙에 균형을 잡고 앉아야 한다던 말씀. 균형이 전부라던 말씀. 노를 보지 말고 배가 지나온 자리에 눈을 고정해야 하고, 지나온 흔적이 앞으로 어디로 향할지 보여준다던 말씀. 하지만 할아버지는 그마저도 앞으로 벌어질 일에 관해 매우 적게 알려줄 뿐이라고 덧붙였다. 모든 건 바로 다음번 노질에 의해 결정된다면서. 할아버지는 주머니 시계를 꺼내고 우리가 물가로 돌아가면 우리의 여정을 출발점에서 도착점까지 하나의 연속선으로 보일 거라고 말했다. 목적과 방향이 있는 이야기. 우리는 그 이야기가 여기에, 다른 어디도 아닌 여기에 있는 것처럼 기억하고, 배가 물가에 닿게 하려고 의도한다. 하지만 도착점과 처음 의도한 목적지는 전혀 다르다. 한쪽이 다른 한쪽보다 더 나을 것도 없다. 현재 위치에 이르러서 여기가 우리가 가려던 곳이거나 적어도 가려는 길 위에 있다고 믿으면 그런대로 위안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의 기억은 오류에 빠지기 쉬워서 우리가 얼마나 똑똑한지 말해주는 다정한 엄마처럼 우리의 노 젓는 행위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전체 이야기에 논리적이고 의도된 요소로 딱 들어맞는다고 말해준다. 경로에서 이탈했을 수도 있고 더는 어디에 있고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인생은 그저 서툴고 어설프게 노 저어 가는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상태일 뿐이라고 생각하면 썩 기분 좋을 리가 없으므로, 누구나 자기 삶을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다시 쓰고 싶어한다. 그래서 성공한 듯 보이는 사람들에게 인생에 대해 말해달라고 하면 대개 현재의 삶이 어릴 때부터 꿈꿔온 (유일한) 꿈이고 현재 어느 분야에서 성공했든 그 분야에서 성공하는 것이 원래부터 꿈이었다고 말한다. 진심일 수도 있다. 다만 그 밖의 모든 꿈을, 길러지지 않고 시들다 사라져버린 꿈을 잊었을 뿐이다. 혹시 모르지, 만약 우리가 (자서전을 쓰는 게 아니라) 삶에 대한 기대치, 말하자면 삶이 어떻게 될 거라고 기대하는지에 관해 쓴다면 삶을 이루는 무의미하고 혼란스러운 우연들을 알아챌지도. 그러나 이런 건 다 잊어버리고 나중에 모두 솎아내서 진정으로 꿈꾸던 것만 보는 것일 수도 있다. pp.660-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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