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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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일기> -김연수-비소설/국내 2023. 12. 5. 12:26
1. 변함없이 눈부신 그 여인의 말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아름답습니다. 지극히 아름답지요. 그리고 늙으면 그 사실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나이가 들면 생각하고 기억하고 사랑하고 감사하게 돼요. 모든 것에 감사하게 되지요. 모든 것에.”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점점 세상사가 못마땅해지는 내게 나치 수용소까지 다녀온 이 할머니가 덧붙인다. “나는 악에 대해 잘 알지만 오직 선한 것만 봅니다.” 이런 할머니들이 있어 나는 또다시 장래를 희망하게 됐다. 그렇게 해서 나의 장래희망은, 다시 할머니, 웃는 눈으로 선한 것만 보는 할머니가 됐다. p.31 2. 타인의 고통에 대한 집단적 무지 혹은 망각을 기반으로 축적된 부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힘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부의 축적을 위해 한국 사회는 사회적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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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아마도> -김연수-비소설/국내 2023. 11. 24. 14:02
1. 캄보디아의 한 스님이 쓴 책을 읽다가 불교의 팔정도(八正道)를 설명하면서 ‘바를 정(正)’을 흔히 해석하듯이 ‘올바르게’나 ‘똑바르게’가 아니라 ‘능숙하게’로 해석하는 걸 보고 동감했다. 예를 들어, 정견(正見)을 ‘올바르게 보기’라고 옮기면 그러지 못한 사람은 ‘그릇되게 보는’ 게 된다. 반면에 이를 ‘능숙하게 보기’로 옮긴다면, 그러지 못한 이는 ‘서투르게 본다’는 의미다. 둘 중 하나를 고른다면, 그릇되게 보는 사람보다는 서투르게 사는 사람이 낫겠다. p.38 2. ‘악은 결코 다른 악을 제거할 수 없다. 누군가가 그대에게 악을 행하거든 그에게 선을 행하여 선으로 악을 제거하라.’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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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 않는다는 말> -김연수-비소설/국내 2023. 11. 6. 11:10
1. 그중 내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건 지지 않는다는 말이 반드시 이긴다는 걸 뜻하는 것만은 아니라는 깨달음이었다.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p.9 2. 최고의 삶이란 지금 여기에서 살 수 있는 가장 좋은 삶을 사는 것이리라. (...) 결국 최고의 삶이란 잊을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하는 삶이라는 뜻이다. 겨울의 달리기는 정말 대단하다. 그건 달리기가 아니라 고문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름의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폭염 속을 달리고 있으면 뜨거운 바람 때문에 숨이 막힌다. 하지만 여름에 할 수 있는 최고의 달리기란 뜨거운 햇살과 서늘한 그늘을 번갈아 가며 지나가는 달리기다.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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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면을 가리키며 걷기> -김연수-소설/국내 2023. 11. 6. 10:41
1. 내가 쓰려고 하는 책은 인간의 권력의지와 인간의 이성은 결코 같은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분열되어 있으며, 갖가지 가면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가장 훌륭하다는 이성 역시 한 개가 아니며 수많은 조각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인간의 퍼스낼러티라는 말 그대로 온갖 종류의 가면이 비치되어 있는 분장실일 뿐이에요. 이 사실을 인식하여야만이 가면을 직접적으로 가리킬 수 있는 것이죠. 이것을 인식하지 않으면 도저히 이해가 불가능한 권력의지라든가, 인간의 욕망을 삭제해 낼 도리가 없어요. 자신 역시 가면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해요. pp.29-30 2. 결국 나의 존재라는 것은 유동하는 것일 뿐이다. 어떠한 진실도 내 몸 안에서는 살고 있지 않다. 내 몸은 텅 빈 동굴일 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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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더보이> -김연수-소설/국내 2023. 11. 3. 10:26
1. 힘이 있다면 누가 희망 따위를 바라겠는가. 이 세상에 이토록 많은 희망이 필요한 이유는 힘없는 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p.12 2. 이 세상과 더불어 웃든지, 아니면 혼자 울든지. p.28 3. 아빠가 살았던 42년은 너무나 짧은 시간이죠. 별들의 숫자에 비하면 그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예요. 하지만 상상해보세요. 그 빛들을 나눠서 쪼일 수 있었다면 아빠는 평생 매초당 7조5499억5047만2325개의 별빛을 받으면서 살았던 것이에요. 그렇다면 그건 정말 대단한 1초였을 거예요. 그렇게 대단한 1초라는 걸 알았더라면 아빠는 울지도 않았을 텐데요. 소주를 마시지도 않았을 거고, 약병을 들고 죽겠다고 아들에게 소리치지도 않았을 테죠. 아빠 인생의 1초가 그렇게 많은 빛으로 가득했다는 걸 알았더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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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소설/국내 2023. 11. 2. 11:20
1. 마흔세 살이란 이런 나이야. 반환점을 돌아서 얼마간 그 동안 그랬듯이 열심히 뛰어가다가 문득 깨닫는 거야. 이 길이 언젠가 한번 와본 길이라는 걸. 지금까지 온 만큼 다시 달려가야 이 모든 게 끝나리라는 걸. 그 사람도 그런 게 지겨워서 자살했을 거야. p.68 2. 우리는 모두 헛똑똑이들이다.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대부분의 사실들을 알지 못한 채 살아간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 대부분은 ‘우리 쪽에서’ 아는 것들이다. 다른 사람들이 아는 것들을 우리는 알지 못한다. 그런 처지인데도 우리가 오래도록 살아 노인이 되어 죽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어리석다는 이유만으로도 당장 죽을 수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이 삶에 감사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