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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가 녹는 온도> -정이현-
    비소설/국내 2023. 11. 6. 10:47

     

     

     

    1. 은우는 알았다. 자신이 슬퍼할 때 사슴이는 속상해서 어쩔 줄 모른다는 것을. 눈물을 그칠 때까지, 길고 축축한 혀로 핥아주려 한다는 것을. 늙은 개에게 필요한 것은 주인의 극적인 감정 변화가 아니다. 하늘이 무너져도 여기 그대로, 네 곁에 있을 거라는 맑고 담담한 믿음이었다. p.20
     
    2. ‘괜찮다’의 어원은 어쩌면 ‘관여치 않는다’는 말에서 비롯되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들었다. 조선 중기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아무데에도 관여하지 않으면 무사할 수 있으리라는 절박한 기대가 그 언어를 만들어냈다는 가설이다.
     아무 편도 들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 중립을 지키면 나를 지킬 수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꺼이 괜찮다고 하는 것이다. 기분이 상해도, 상처를 받아도,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 짓는 것이다. 실은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종이필터 밑바닥에 가라앉은 검은색 커피 찌꺼기처럼 갈피를 잡기 어려운 감정이 그대로 남았으면서. p.42
     
    3. 무작정인 것과 무작정이 아닌 것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을, 종잇장을 반으로 접어 맞추듯이 분명한 것은 우리 생에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그는 알아가고 있었다. p.52
     
    4. 상대방이 싫어졌다는 이유만으로 도망치는 것이 아니다. 그 옆의 내가 싫어서 도망치는 경우도 있다. 그 사람 옆에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고 어색할 때, 혹은 그 모습이 스스로도 생각지 못하던 방향으로 변해갈 때 우리는 이별을 결심한다.
     일상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곤 하는 습관이 새로 생겼다고 해서, 일 년 후의 삶이 까마득한 암흑처럼 느껴진다고 해서, 그게 모두 ‘그 사람과의 관계’ 탓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엄밀하게 말해 ‘내 탓’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신과는 이별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상대방과 이별한다. p.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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