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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오찬호-
    비소설/국내 2023. 11. 6. 11:20

     

     

    1. 부끄러움을 제대로 느끼는 사람은 성장한다. 무결점의 인간이어서가 아니라 과오를 줄여 나가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빨리 사과했고 변명하지 않는다. 괜한 강박에 사로잡혀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지 않는다. 바쁘고 힘들고 억울하다고 타인을 능멸하지 않는다. 차별, 혐오, 폭력에 노출된 이들을 보면서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것 아니겠냐는 냉소적 태도를 보이지 않는다. “남들도 마찬가지니까 그래도 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p.13
     
    2. "소수의 인권을 지켜 주기 위해서 다수의 인권이 피해를 당하고 있다.“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이런 표현은 혐오를 나름 혐오스럽지 않게 표현하려다가 논리의 무리수를 둔 대표적인 경우다. 동성애자가 다수의 인권에 무슨 피해를 준다는 말인가? 동성애자는 동성애자와 사랑한다. 누군가가 이성과 사랑하지 않는다고 어찌 이성애자의 인권이 침해당한다 말인가? 이런 무리수가 가능한 건 그 상대가 늘 혐오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차별하고, 혐오하고도 ‘괜찮다’는 사람이 많은 이유다. p.33
     
    3. 한국사회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평균적으로’ 공포에 노출되어 있다. 남성들이 ‘군대 복무기간’에 단지 남자라는 이유로 공포에 노출되어야 하는 폭력을 경험했다면, 여성들은 그 억울한 남자들이 만들어 놓은 길고도 견고한 장벽에 일상적으로 움찔한다. 평균적으로 공포에 노출되어 있으면 상시적으로 불안하다. p.43
     
    4. 나이가 많다고 다 꼰대가 아니다. 특정한 권력 관계를 악용해 상대의 모든 걸 간섭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꼰대다. 나이가 젊다고 다 꼰대가 아닐 이유도 없다. 자유라는 명목으로 주변의 타당한 비판에 귀를 닫거나 개성이라는 달짝지근한 단어를 남발하며 자신의 기준 ‘외’의 것을 다 구린 것으로 바라본다면 -특히나 ‘옷’처럼 도무지 사람의 격을 판단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준으로- 그 사람이 꼰대다. pp.56-57
     
    5. 장애인은 그저 놀러갔을 뿐인데 ‘남의 권리를 침해한 듯한’ 나쁜 사람의 느낌을 받는다. 이때부터 고작 놀이터를 가기 위해 ‘저기 어딘가’로 차를 타고 이동해서 장애인들하고만 만난다. 자연스레 일상의 모든 공간은 비장애인을 위한 것, 한쪽 구석의 요만큼은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 되고 ‘요만큼’을 보장해 주었으니 ‘이만큼’의 차별은 차별이 아닌 것이 된다. (...) 차별하면서도 차별한 적이 없다고 느끼게 되는 사회에서 ‘누구든지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11조 1항은 참으로 낯설다. p.67
     
    6. 아내의 외부 일정은 막내가 유치원에 있을 시간에만 가능하다. 저녁 약속은 아예 없고 ‘저녁 이후 남편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만나는’ 모임에는 가끔 나간다. 물론 내가 스케줄이 있으면 못 나간다. 최소 2~3일 전에는 내게 “나갈 거다!"가 아니라 ”나가도 되나?“라고 묻는다. 그걸 왜 물어보냐면서, 내가 집에 있을 때는 마음대로 하라면 ”고맙다“는 말을 결코 빼먹지 않는다. 남편에게 배려받는다고 생각하지 않고서야 불가능한 반응이다. 내가 집안일 개의치 않고 외부 스케줄을 소화하는 걸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으니 아내 역시 집안일 개의치 않을 수 없는 심정을 자연스럽게 가진 것 아니겠는가. 참고로 나는 늦은 밤 약속을 ‘사전’ 허락받지 않는다. 아내는 가끔 밖으로 나가며 내게 미안해하고 나는 다른 남편들만큼 밖에 안 나간다고 뿌듯해한다. p.80
     
    7. 벨트를 무조건 착용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침해가 아니라 타당한 통제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타인에게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삶에 대한 광범위한 성찰이 필요하다. 직접적으로 차별과 폭력에 가담하지 않아도 자신이 무의식중에 토양을 제공하는 건 아닌지 따져 봐야 한다. 별 생각 없이 말하는 ‘흑형’이라는 표현이 일상에서 사람을 피부색으로 구분 짓는 습관으로 이어져 개인의 문제를 ‘흑인’ 아무개의 모습으로 오해케 하여 특정 인종에 대한 고정관념이 형성될 수 있음을 경계하는 건 결코 비약이 아니다. (...)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개인에 대한 적절한 제재를 가하는 것이 타당한 것처럼 합의된 절대 악은 지나칠 정도의 자기 검열을 통해서 예방되어야 한다.
     
    8. 1등에게 박수칠 때 놀라는 건 다큐멘터리의 한 장면이었다. ‘언제부터 경쟁심이 심했냐’는 외국인의 물음에 한국 대학생이 초등학교 때 교사가 100점 받은 사람만을 일으켜 모두로부터 박수 받게 하는 모습을 보면서 ‘1등 아니면 소용이 없구나’라고 생각이 들었다고 하자, 외국인은 화들짝 놀라면서 이렇게 대꾸한다. “정말이야? 다들 보는 앞에서 한 명만 일으켜서 박수 받게 했다고?”
     
    9. 담임 심기 건드린다는 이유로 교육을 가장한 폭력의 현장을 대수롭지 않게 바라본 사람들, 이들은 갈등을 일으키는 걸 두려워하는 사람들이다. 그저 주어진 규칙을 순리라고 받아들이고 이를 깨는 걸 상상조차 하지 못한다. 군말 없이 시키는 대로만 사는 자신의 멋쩍음은 스스로를 편향되지 않고 중립적인 사람으로 포장하며 정당화한다. p.200
     
    10. 미사여구 가득한 말과 글로 온갖 고상한 척을 하는 사람일지라도 실제 현실의 무게가 주는 압박에서 자유로운 경우는 드물다. 단연코 한국에서 법보다 문화가 위다. 이곳에서 사회생활은 법의 잣대로 보아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사람이 되는 것과 무관하다. 이 압력을 지속적으로 받으면 우리는 현실을 법정이라 착각하고 고정관념에서 빠져나오길 거부하는 자신이 재판관인 줄 안다. 오판은 비일비재요, 각성은 지난할 수밖에 없다. 오답도 우기면 정답이 된다. p.256
     
    11. 아무도 배제되지 않는, ‘우리와 그들’이라는 이분법적 인식으로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진정한 집단주의의 실천인 셈이다.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 자신이 집단주의를 신봉하는 가해자로 살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는 것부터 해야 하지 않을까? 집단에 충성하고자 자신의 정체성이 사라져 있음에 수치를 느껴야 하고, ‘사라진 자신’ 덕택에 책임에서 자유로워져 타인을 맹렬하게 공격하는 부끄러운 일상이 없는지 반문해야 한다. p.257
     
    12. 인간으로서는 미안하지만 부모로서는 부끄럽지 않다고 여기고 아파트 공동체를 위해서 인류 공동체의 가치는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건 단순히 사람이 이기적이어서가 아니라 ‘객체는 책임을 질 필요가 없다’는 식의 생각에 익숙해서다.
     
    13. ‘내 알 바 아니다’를 가슴에 새기며 자란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숨막힐’ 사회에서 ‘숨 막혀’ 죽는 사람이 많은 건 어색하지 않다. 우울증으로 아파하는 사람에게 한국인들은 “운동 열심히 하면 기분 상쾌해진다”는 엉터리 해결책을 제안한다. 이해받지 못하는 우울증 환자들이 한강대교를 찾을 수밖에 없다. 극단의 선택을 한들 추모는커녕 ‘그런 정신력으로 어차피 제대로 살긴 어렵다’는 조롱만이 부유한다. (...)
    공감의 시작은 자신이 타인의 상황에 쉽사리 공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공감의 실천은 “나도 네 마음 안다”는 기만적인 사람이 되기를 거부하고, 아픈 것도 서러운 사람에게 “어쩌다가 그랬어?”라고 묻는 황당한 사람이 되지 않는 거다. “내가 감히 너의 슬픔을 알 순 없겠지만, 노력할게”라고 말하면서 상대를 조금이라도 이해하려는 성찰적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지, 입으로만 ‘공감’을 말하는 건 아무런 의미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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