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비소설/국내 2023. 11. 21. 11:03
1. “우리가 스스로 야기한 상처에 대해서는 아무런 동정심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이 야기하지 않은 고통 앞에서는 울 수 있어도 자신이 야기한 상처 앞에서는 목석 같이 굴 것이다.” (《사랑의 탄생》, 사이먼 메이) p.25
2. 트라우마라는 말의 가장 오래된 뿌리는 ‘뚫다’라는 뜻의 그리스어다. 트라우마에 의해 인간은 꿰뚫린다. 정신분석 사전은 그 꿰뚫림의 순간을 구성하는 요소들로 충격의 강렬함, 주체의 무능력, 효과의 지속성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설명으로는 실감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래서 언젠가 다음과 같은 설명을 들었을 때에야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아주 조금 이해할 수 있었다. “트라우마에 관한 한 우리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에 불과하다.” 그러니까 ‘나는 트라우마를...’이라는 문장은 애초에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트라우마는 나를...’이라고 겨우 쓸 수 있을 뿐이다. pp.42-43
3. 이 노래(‘Track 7’, 이소라)를 부를 때 그는 고통을 잊기 위해 수면제를 달라고 탁한 목소리로 애원한다. 그리고 정확히 마지막 “난”에서 그의 목소리는 갈라져 무너진다. “완벽한 너나 참아”나 “술보다 이게 나아”와 같은 구절들은, 칼을 들고는 있으되 그 누구를 찌를 힘이 없어 허우적대다가 금나 제 몸에 상처를 입히고 마는, 그런 사람 같다. 가끔 그는 관객에게 노래를 들려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너무 오래 단둘이 있지 않기 위해서 무대에 오르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때 그는 자신의 고통과 함께 무대에 오른다. 그의 고통은 수다스럽지 않다. 진정한 고통은 침묵의 형식으로 현존한다. 고통스러운 사람은 고통스럽다고 말할 힘이 없을 것이다. 없는 고통을 불러들여야 할 때 어떤 가수들은 울부짖고 칭얼댄다. 그는 그럴 필요가 너무 없다. p.88
4. 사고와 사건은 다르다. 예컨대 개가 사람을 무는 것이 사고이고 사람이 개를 무는 것이 사건이다. 이 둘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고는 ‘처리’하는 것이고 사건은 ‘해석’하는 것이다. ‘어떤 개가 어떤 날 어떤 사람을 물었다’라는 평서문에서 끝나는 게 처리이고, ‘그는 도대체 왜 개를 물어야만 했을까?’라는 의문문으로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게 해석이다. 요컨대 사고에서는 사실의 확인이, 사건에서는 진실의 추출이 관건이다. 더 중요한 차이가 있다. 그 일이 일어나기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 사고가 일어나면 최선을 다해 되돌려야 하거니와 이를 ‘복구’라 한다. 그러나 사건에서는, 그것이 진정한 사건이라면, 진실의 압력 때문에 그 사건 이전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무리하게 되돌릴 경우 그것은 ‘퇴행’이 되고 만다. p.115
5. 내가 타인을 보는 곳 말고 타인이 나를 보는 곳으로 가기, 거기서 내 눈을 버리고 타인의 눈을 얻기, 그리고 마침내 그 타인의 눈으로 나를 보게 되기. 이러한 ‘관점의 이동’을 통해 그녀는 실연의 상태와 단절한다. p.120
6. “혐오는 혐오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선동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가 타인을 괴롭히기 위해 제 지위를 이용할 때, 우리는 모두 패배할 것입니다.” (메릴 스트립) p.214
7. 비판은 언제나 가능하다. 풍자는 특정한 때 가능하다. 그러나 조롱은 언제나 불가능하다. 타인을 조롱하면서 느끼는 쾌감은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저급한 쾌감이며 거기에 굴복하는 것은 내 안에 있는 가장 저열한 존재와의 싸움에서 패배하는 일이다. 이 세상에 해도 되는 조롱은 없다. p.217
8. ‘국정농단’에서 ‘농단’이라는 말이 짐작과는 달리 ‘희롱’이 아니라 다른 뜻을 갖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나로서는 올해의 일이다. 그 말의 정확한 의미는 ‘깎아 세운 듯이 높이 솟은 언덕’이다. 사전에 붙어 있는 풀이는 이렇다. “홀로 우뚝한 곳을 차지한다. 가장 유리한 위치에서 이익과 권력을 독점한다.” 유래는 《맹자》에 있다. 한 상인이 있어 가장 높은 곳(농단)에 올라가 시장의 구조를 파악한 뒤 어떻게 해야 큰 이익을 얻을 수 있을지 저울질했다고, 사람들이 그 얄미운 상인에게 세금을 물리기 시작한 데서 ‘농단’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pp.222-223
9. 수면은 각성의 반대말이 아니다. 수면은 각성의 근거다. 자야만 깨어날 수 있다. 이 통찰을 절망과 희망이라는 짝에다가 적용해보려고 한다. 앞으로 5년 동안 한국 사회가 다시 긴 잠에 빠진다 하더라도, 5년이 지난 뒤에도 우리가 여전히 자고 있지는 않을 것이라고. 오히려 그 5년 동안의 잠 때문에 우리는 깨어남이라는 사건을 처음인 것처럼 확실하게 경험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사실은 믿지 않으면서, 나는 쓴다. 희망은 종신형이니까. p.232
10. 동전치기를 잘 못하고, 한글을 못 읽고, 총을 못 든다. 다시 강조하다.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이다. 동전치기를 잘 못하는 두한이 자책하자 철옹이 소리를 지른다. “원래 그런 건데, 네가 뭐가 미안해!” 그래, 미안해야 할 사람들은 따로 있다. 못 하는 것이 아니라 안 하는 사람들. 귀가 있는데도 듣지 않는 사람들이 세 이야기 모두에 나온다는 것도 공통점이다. (...)
인권에 대해 이미 충분히 섬세한 사람들이 이 섬세한 영화(‘어떤 시선’)를 보고 자신이 그동안 더 섬세했었어야 했다고 자책하는 일이 벌어지기 보다는, 다 알기 때문에 안 봐도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이 보면 좋겠다. 이 세상에서 가장 열기 어려운 것은 ‘이미 다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의 문이다. p.367
11. 우울하고 애매하게 만들기. 이를 각각 ‘멜랑콜리’와 ‘아이러니’라고 부른다. 잃어버린 것을 포기하지 못한 채 상실의 고통과 한 몸이기를 끝내 고집하는 것. 믿는 척하면서 안 믿고, 지는 척하면서 이기는 것. 전자는 우리가 무언가 결정적인 것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음을 고독하게 증거하고, 후자는 절대적인 진리라 간주되는 것들이 한낱 상대적인 진리일 뿐임을 경쾌하게 폭로한다. 멜랑콜리는 ‘증상’이고 아이러니는 ‘태도’이지만 여하튼 둘 다 ‘방법’이다. 현대문학, 그 우울함을 퍼뜨리고 애매함을 창조하는 어떤 방법. p.383
'비소설 > 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의 정도> -서정락- (0) 2023.11.22 <책에 빠져 죽지 않기> -이현우- (0) 2023.11.21 <사장 부장 다나가, 혼자 있고 싶으니까> -이환천- (0) 2023.11.21 <왜 그러세요, 다들> -글 전국 중고등학생 89명, 그림 자토- (0) 2023.11.21 <당신에게 눈치를 선물하고 싶습니다> -정소담- (0) 2023.1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