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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필로 쓰기> -김훈-
    비소설/국내 2023. 11. 24. 16:08

     

     

    1. 결혼이란 오래 같이 살아서 생애를 이루는 것인데, 힘들 때도 꾸역꾸역 살아내려면 사랑보다도 연민이 더 소중한 동력이 된다. 불같은 사랑, 마그마 같은 열정은 오래 못 간다. 왜냐하면 사랑이란 대개 이기심이 섞이게 마련이고 뜨거운 열정은 그 안에 지겨움이 들어 있어서 쉽게 물린다. 연민은 서로를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다. 연민에는 이기심이 들어 있지 않다. 그러므로 사랑이 식은 자리를 연민으로 메우면, 긴 앞날을 살아갈 수 있다. 오래 연애하다가 결혼한 부부가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연애를 오래 했으면 서로 성격을 잘 알 터인데, 성격 차이로 이혼했다는 말은, 이른바 사랑이 사그라진 자리에 연민이 생겨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랑은 단거리이고 연민은 장거리이다. 빚쟁이처럼 사랑을 내놓으라고 닦달하지 말고 서로를 가엾이 여기면서 살아라. pp.83-84

    2. 전쟁에서 리더십이란 고난을 돌파하고, 고난을 향해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몰아가는 힘일 것이다. p.116

    3. 삶은 life가 아니고 Being alive이다. Being alive는 그리움 없고 기다림 없는 시간이다. p.147

    4. 집안마다 입맛과 전래에 따라 차이가 있기는 했으나 큰 줄거리는 같았다. 오이지는 열흘쯤 지나서 꺼내 먹는데, 오래될수록 새큼한 맛이 강해진다. 이 열흘 남짓 동안 오이지 항아리 속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것인가.

     이 대목에서부터 나의 글은 길이 막힌다. 나는 더듬어서 가겠다. 그 항아리 속의 비밀을 경영하는 것은, 아마도, 틀림없이, ‘시간의 섬세하고 전능한 손길일 것이다. 시간은 우주의 운행과 역사의 흥망성회, 중생의 생로병사, 별들의 생성과 소멸뿐 아니라 김칫독, 된장독, 고추장독, 젓갈독 안의 비밀까지도 두루 관장하면서 있음being’에서 becoming’으로 사물을 전환시키는데, 그 신적神的인 작용이 가장 선명하고 육감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단연코 오이지 항아리 안이다. 오이지 항아리 속 전환의 진행방향은 그 놀라운 단순성인데, 오이지는 단순성을 완성해가면서 깊어지고 깊어져서 선명해진다. pp.221-222

    5. 약국에서 약 나오기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하품할 때 입 안을 들여다보았더니, 분홍빛 잇몸에서 새싹 같은 젖니가 돋아나오고 있었다. 젖니는 하얀 별처럼 보였다. p.339

    6. 크레타에서 아테네로 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승객들이 보딩 게이트 앞에 모여 있었다. 대합실 TV에서 월드컵 축구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승객들은 주먹을 흔들며 함성과 탄식을 내질렀다. 어느 나라 선수인지, 골키퍼가 땅을 박차고 솟아올라 몸을 날렸다. 솟아오른 골키퍼는 땅바닥에 몸을 갈며 쓰러졌다. 네 활개를 벌린 그의 육신은 도장을 찍듯이 땅바닥에 찍혔다. 그의 가슴은 비어 있었다. 공은 그의 육신이 어찌해볼 수 없는 공간을 가르며 네트에 꽂혔다. 몸이 땅에 찍히기 직전에, 아마도 그는 자신의 실패를 알았을 것이다.

     이긴 자들은 날뛰고 뒤엉키고 올라타고 부르짖었다. TV 카메라는 끌어안고 춤추는 관중을 비추었다. 그 함성 속에서 공을 놓친 골키퍼가 홀로 땅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의 육신이 내뿜은 한 가닥의 맹렬한 적막이 관중의 함성을 뚫고 치솟는 듯했다. 그는 외로워 보였지만, 비참하지는 않았다. 그의 패배와 그의 추락에는 치욕이 스며들어 있지 않았다. 그의 적막은 외로움이라기보다는 순결이었다. pp.370-371

    7. 공을 놓친 골키퍼가 땅바닥에 쓰러지고 함성 속에서 승부가 엇갈려도 공에는 늘 아무 일도 없다. 공은 거기에 가해지는 발길질의 힘을 정직하고 순결하게 받아들이면서 튕겨져 나가지만, 공에는 그 힘의 흔적이나 승부의 기억이 묻어 있지 않다. 공은 만인의 몸의 동작을 정확하게 받아내지만, 스스로 아무것도 도모하지 않는다. 그 공이 인간과 인간 사이를 매개한다. 공을 쫓아서 달려가는 인간을 바라보면서 나는 둥글다는 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되었다. 둥근 것은 거기에 강해지는 힘을 정직하게 수용하고, 땅에 부딪히고 비벼지는 저항을 순결하게 드러내서, 빼앗기고 뺏는 동작들 사이의 적대관계를 해소시킨다. p.373

    8. 2018년 가을에 문재인 대통령과 그 일행이 평양에 가서 냉면을 잡수시니까, 서울 거리의 냉면 식당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대통령을 따라 냉면을 먹었다. TV의 먹방 프로그램에서도 미남 미녀들이 나와서 새삼스레 평양냉면의 맛을 치켜세우고 있다.

     우리네 사람들이 화나서 모이면 무섭고, 순할 때는 이처럼 착하니 무섭고 착한 것이 다 나라의 복이다. p.384

    9. 맛은 관념이 아니라 관능으로 작동하고 관능은 감각으로써만 소통된다. 맛은 개념이 아니고 기호가 아니고 상징이 아니다. 맛은 인간과 자연의 직거래이다. 맛은 정의가 아니고 불의가 아니다. 인간은 맛을 통해서 자연에 사무치고 저 자신의 육체를 자각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간은 개인이며 또 공동체이다. 음식을 먹을 때, 맛은 혓바닥에서 목구멍으로 넘어가는데, 인간의 마음은 맛이 사라져가는 목구멍의 안쪽을 따라간다. 개별적 인간의 목구멍으로 넘어간 맛이 공동체의 정서와 공동체의 독자성을 이룬다. pp.385-3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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