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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각을 빼앗긴 세계> -프랭클린 포어-
    비소설/국외 2023. 12. 1. 10:59

     

     

    1. 지신의 영역에서 독점과 순응주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위험이다. 독점은 힘있는 기업이 시장 지배력을 사용해서 경쟁의 다양성을 억누르는 것이며, 순응주의는 그런 독점 기업들 중 하나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시장 지배력을 사용해서 의견과 취향의 다양성을 말살할 위험을 말한다. 집중화에는 동질화가 뒤따른다. 변화한 식생활에서 우리는 이런 패턴을 뒤늦게 발견했다. p.16

    2. 테크 기업들은 인간의 진화를 바꾸려는 목적을 이미 달성했다. 우리는 모두 이미 일정 부분 사이보그가 되었다. 우리의 폰은 기억의 일부를 담당하고 있고, 기초적인 두뇌 활동을 알고리듬에 위탁했으며, 자신만의 비밀을 외부 서버에 저장해서 컴퓨터로 정보를 캐 갈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항상 기억해야 할 점은, 우리가 단순히 기계와 한몸이 되고 있는 게 아니라, 그 기계를 운용하는 기업들과 한몸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p.20

    3. “(지구상에) 두 개의 유기체가 존재한 후부터 생명체는 공진화(共進化, coevolution)를 필요로 했다. 생명체는 다른 생명체에 의존할 때 더 풍성하게 성정할 수 있었다... 우리는 의존을 피할 수 없다. 어떤 종류의 의존이 더 나은가의 문제일 뿐.” p.39

    4. 공짜 콘텐츠의 범람은 새로운 형태의 결핍을 낳았다. 읽고 보고 들을 것이 넘쳐나고, 링크를 따라가다 보면 끝도 없이 사이트가 이어지는 상황에서, 오디언스의 주의를 끄는 일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미국의 현대 소설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는 이런 상황을 “총체적인 소음(Total Noise)”이라고 불렀다. 총체적인 소음 속에서 우리는 집중력이 떨어진 채로 인터넷의 여기저기를 떠돌면서 글을 읽게 되었다. 노벨상을 수상한 경제학자 허버트 사이먼은 1970년대에 나타나기 시작했던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했다. “정보가 소비하는 것이 무엇인지 명백하다. 바로 정보 수용자의 주의력이다. 따라서 정보가 풍부해질수록 주의력은 결핍된다.” 독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붙잡아둘 수 없다는 뜻의 주의력 결핍은 중요한 개념이다. 이는 지식의 생산자들에게는 존재론적인 문제이며, 지식의 소비자들에게는 부담감과 혼란의 원인이다. (...)

     이런 상황에서 전통적인 미디어는 심각한 타격을 입었고, 10년 넘도록 주의력 결핍과 전쟁을 벌이면서 오디언스를 다시 붙들 수 있는 전략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미디어 기업들을 쥐어짜는 상황-지식의 풍요, 주의력 결핍-은 새로운 정보 독점기업을 탄생시켰다. 이들 정도 독점기업은 끝없이 방대해져만 가는 거대한 지식 덩어리에 질서를 부여한다. 아마존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 가장 큰 서점임은 물론이고, 소매업에 질서를 부여해서 일관되고 사용이 편리한 시장으로 만들었다. 구글을 웹 전체를 솎아내어 사람들이 차근차근 합리적으로 살필 수 있게 해주며, 페이스북은 사회 생활을 관리하는 방법은 물론, 인명록을 제공한다. 이런 도구들이 없다면 인터넷은 사용 불가능하다. 과학책 저자 제임스 글리크는 “우리가 사는 세상과 바벨의 도서관 사이를 연결해주는 것은 검색과 필터링뿐이다.”라고 주장했다. pp.117-118

    5. 스낵 콘텐츠란 이제는 업계에서 통용되는 용어로, '직장에서 지루해하는 보통 사람들‘, 또는 지하철 승강장에서 시간을 때우고 있는 사람들의 흥미를 끄는 차트, 목록, 동영상, 짧은 꼭지 등을 뜻한다. 분명한 것은, 주제는 심각하더라도 표현 방식은 빠르게 볼 수 있고 재미도 있어서 페이스북에 퍼나르기에 적합해야 한다. p.181

    6. 경제적인 관점에서 네트워크가 갖는 위험성을 독점이다. 경쟁 시장이 거대 기업의 지배 하에 놓이게 된다는 것이다. 문화적인 관점에서 네트워크의 위험성은 순응이다. 사상의 경쟁 시장에서 경쟁이 줄어들고, 합의를 가장 중요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케빈 켈리는 열정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치다가 무심결에 자신의 비전이 초래할 수 있는 어두운 결과를 말해버렸다. 그는 “벌집형 사고”를 극찬했다. 벌집형 사고는 우리가 저자에 대한 숭배를 멈추고, 크라우드소싱과 위키와 소셜미디어에 굴복해 휩쓸리고, 내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현명한 대중’을 따를 때 일어난다. 벌집형 사고는 인류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이루면서 함께 일하는 모습을 설명하기 위해 만든 표현이다. 하지만 정말로 벌집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가 역사 속에서 확인했듯이, 이런 종류의 의견 일치는 성형 미인처럼 숨막히는 동질성에 불과하다. 이는 반대 의견을 죽이고 독창성을 질식시킨다.

     이는 이 시대의 정치에도 적용된다. 우리 시대는 서로 적대적인 이념으로 무장한 패거리들의 한 치도 양보하지 않는 극한 대립으로 규정된다. 그렇지만 작동 불능 상태에 빠진 시스템의 근본 원인은 분열 그 자체가 아니다. 다양한 원인들이 있지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순응이다. 페이스북은 두 진영의 벌집형 사고를 만들어냈는데-벌집에는 언제나 여왕벌이 있다-각 진영은 쉽게 동의하는 태도를 키우고 다른 의견을 처벌하는 생태계다. 벌집형 사고는, 사실과 허구를 구분하는 능력을 약화시키고 자기편 노선을 강화하는 증거만 편향적으로 받아들이게 함으로써, 지적으로 무력화된 사고다. 페이스북은 합의를 이루어냈지만, 약속했던 종류의 합의가 아니었다. 페이스북 네크워크의 힘은 세상을 하나로 만드는 대신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았다. 우리가 과거에 숭상하던 천재와 독창성에 아무리 단점이 많았다 해도 이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 pp.229-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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