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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간이 만든 공간> -유현준-
    비소설/국내 2023. 12. 7. 12:02

     

     

    1. 강수량이라는 기후적 차이는 건축 디자인의 차이도 만들었다. 강수량은 땅의 단단한 정도를 결정한다. 비가 적게 오는 서양의 땅은 단단하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돌이나 벽돌 같은 무겁지만 단단한 건축 재료를 이용해서 벽으로 지붕을 받치는 벽 중심의 건축을 했다. 반면 비가 많이 오는 지역인 동양은 장마철에 땅이 물러지기 때문에 무거운 재료로 만든 벽은 쓰러진다. 따라서 가벼운 건축 재료인 나무를 사용하였고, 자연스럽게 나무 기둥으로 지붕을 받치는 기둥 중심의 건축을 하게 되었다. p.10

    2. 회화나 음악과는 다르게 건축만이 가지고 있는 소통의 도구는 비어 있는 공간인 보이드(void) 공간이다. 건축물 덩어리에서 전달되는 상징성은 조각에도 있다. 고딕 성당 내부에 줄지어 서 있는 기둥 옆을 걷다 보면 리듬감이 느껴지고 창문을 보면 비례의 조화도 느껴진다. 이런 리듬과 하모니는 건축뿐 아니라 음악에서도 나타나는 특징이다. 하지만 빈 공간이 주는 시각적 3차원 정보는 다른 어느 예술이나 문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같이 건축물의 빈 공간은 건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사 전달 수단이요, 특징이다. 그래서 이 같은 빈 공간을 어떻게 디자인했느냐가 문화적 성격의 특징을 규정하는 잣대가 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서양 문화권의 공간은 벽으로 구획된 기하학적인 모양의 빈 공간을 가지고 있는 반면, 동아시아 문화권의 공간은 기둥으로 만들어져서 빈 공간의 내부와 외부의 경계가 모호한 성격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각각의 문화는 독특한 빈 공간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pp.25-26

    3. 동양에서 건축물이 자연을 바라보게 하는 프레임으로 작동한다면, 서양에서는 건축물 자체가 목적이 되는 건축이 되었다. 그래서 동양에서는 오랜 시간 동안 존속되는 건축물이 적은 것이다. 잘 썩는 목재라는 재료 자체의 제약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건축물 자체가 목적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극동아시아에서는 피라미드하기아소피아 성당같은 거대한 크기의 덩어리를 갖는 건축물이 적다. 대신 건축물 안에서 바깥 경치를 구경하기 좋은 건물은 많다. 그런 의미에서 외국인들에게 경복궁의 진정한 가치를 느끼게 해 주려면 근정전이나 경회루를 밖에서만 바라보게 해서는 안 된다. 안에서 바깥 경치를 보게 해 줘야 우리 문화의 진수를 제대로 전달할 수 있다. p.78

     

    4. 이 같은 동서양의 다른 가치 체계는 공간을 뜻하는 단어만 비교해 보더라도 쉽게 알 수 있다. 서양인들의 공간을 뜻하는 단어는 ‘space’. 이 단어는 우주를 뜻하기도 하는 ‘universe’와 같은 의미다. ‘universe’‘cosmos’와 동의어다. 그런데 ‘cosmos’규칙이라는 뜻을 가지기도 해서, 반대말은 불규칙을 뜻하는 단어인 ‘chaos’. 서양 언어 속 단어의 상관관계를 보면 공간’, ‘우주’, ‘수학’, ‘규칙은 같은 범주에 속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양인의 머릿속에 공간은 수학적 규칙을 갖는 것이라는 관점이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듯 서양의 공간은 다분히 수학적인 분석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반면, 동양의 공간은 비어 있다는 뜻의 한자 ()’과 사이라는 뜻의 한자 ()’이 합성된 단어다. ‘사이라는 것은 두 개의 개체가 있어야만 만들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은 둘 사이의 관계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 공간이라는 단어는 비움관계의 합성어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렇듯 공간을 뜻하는 단어 하나만 살펴봐도 동양에서는 단순히 비어 있는 것 이상의 가능성을 보는 비움과 상대적 가치인 관계로 공간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p.124

     

    5. 동양의 도자기가 서양으로 대량 유입되면서 처음으로 영향을 받은 디자인 분야는 조경이다. 왜냐하면 수입된 도자기 표면에 보통 정원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서양인들은 생전 처음 보는 우아한 곡선 지붕의 건축물을 보고 흥미를 느꼈다. 그 충격은 마치 상자 같은 건물만 보면서 자라난 우리가 프랭크 게리의 디즈니 콘서트홀이나 동대문 ‘DDP’ 같은 곡면의 건축물을 보았을 때와 비슷한 충격이 아니었을까 추측된다. 기존 유럽의 건축은 기하학적이고 직선의 경직된 모습인 반면, 도자기 속에 그려진 정자 건축은 자유로운 곡선의 모습이었다. 건축적으로 서양의 벽 중심의 건축과 달리 도자기 그림 속 건축물은 기둥과 지붕만 있는 정자가 그려져 있었다. 정원의 모습도 유럽의 정원은 직선의 기하학적인 디자인이었다면 도자기 속에 보이는 동양의 정원은 자연 그대로를 옮겨 놓은 듯한 느낌의 바위와 나무들의 배치였다. 서양인들은 이전에는 접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정원과 건축물을 보고 동경하고 따라하게 되었다. 영국인들이 정원에 정자처럼 생긴 파고라(pergola)를 짓고 중국차를 마시는 전통은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동양 스타일 따라 하기는 정원에 그치지 않고 문화 전반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어 지금의 한류같은 일종의 중국풍이라고 할 수 있는 시누아즈리라는 현상이 나타났다. 시누아즈리는 문화적으로 강력하고 지속적이었던 유럽 내 경향 중 하나로 장식, 가구, 정원 내 설치된 탑, 식기, 벽걸이 융단 등 거의 모든 디자인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p.179

    6. 건축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는 미스 반 데어 로에라는 이름이 생소하겠지만, 그 이름을 알아두면 좋을 듯하다. 그는 음악으로 치자면 베토벤이나 모차르트 같은 인물이다. 앞에서 나온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와 뒤에 나올 르 코르뷔지에와 더불어 근대 건축의 4대 거장 중 한명이다. 나머지 한 명은 알바 알토라는 핀란드 건축가인데, 사실 후세 건축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그는 나머지 세 명에 비해서 비중이 좀 떨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4인조 비틀즈에서 드럼을 치는 링고 스타같다고 할까. p.212

    7. 우리가 점점 더 디지털화되어 가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점점 더 아날로그적인 것을 찾는 이유도 있다. 손 글씨 쓰기 연습, 색칠하기 연습, 가구 만들기 같은 이해할 수 없는 아날로그 열풍은 지나치게 디지털화되어 가는 현실에 대한 반작용이다. 디지털화되어 갈수록 나 자신은 데이터화된다. 나라는 존재는 이제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올라간 디지털 사진들로 대변된다. ‘라는 존재가 비트로 구성된 데이터화되는 현실은 원자로 구성된 몸을 가진 우리로 하여금 점점 불안감을 느끼게 만든다. 데이트로 대체되어 가는 나를 찾기 위해서 더욱 더 물질로 느낄 수 있는 아날로그적 문화에 애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p.382

    8. 전염병이 있어도 마지막까지 모이려는 곳은 종교 공간일 것이다. 모여야 권위가 생기기 때문이다. (...) 한 공간에 모이지 못하면 종교는 집단 공간이 만드는 권력을 잃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전염병은 종교 단체 최고의 적이다. p.388

    9. 새로운 생각은 시대에 따라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크게 두 가지 원리가 있다. 첫째는 제약이고, 둘째는 융합이다.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생각이 나오고, 서로 다른 생각이 융합되었을 때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 둘을 하나로 묶는 공통점이 있다. 모든 창조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변화와 새로움을 거부했던 문화는 발전을 멈췄다. 그리고 그런 문화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렇다면 열린 마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자신의 불완전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신이 완전하다고 느끼는 자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한다. 역사 속 대표적인 사례는 이집트 미술이다. 이집트인들은 자신들이 만들어 낸 창조물과 사랑에 빠졌다. 그들은 자신들이 찾아낸 비율과 자세가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스스로 진화가 완성된 상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새로운 것을 만들려는 시도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똑같은 조각상을 만들었다. 이집트의 조각상은 너무나 훌륭하다. 5천 년 전에 만들어진 조각이라고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얼굴과 균형 잡힌 몸을 가지고 있다. 두 다리는 쓰러지지 않게 한 발을 앞으로 내밀며 서 있고 얼굴을 정면을 바라본다. 그림을 그릴 때에도 사람의 특징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 얼굴ㅇ느 옆모습을 그리고 몸은 정면을 그린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이 완전하다고 믿었기에 그들의 미술은 수천 년 동안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그리스 미술은 달랐다 .그리스인들이 처음 조각상을 만들었을 때 그 수준은 이집트 조각상과 비교해서 너무 떨어졌다. 하지만 이들은 2백 년도 되지 않아서 이집트 미술을 뛰어넘는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자신의 조각이 완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매번 조각할 때마다 조금씩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많은 학자가 이집트 문화를 대단하다고 여기지만 현재 인류 문명을 이룬 근본적인 정신은 그리스에서 그 뿌리를 찾는다. 그 근본정신은 다름 아닌, 더 좋은 것으로 언제든지 변화할 수 있을 만큼 나는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금이 진화의 마지막 단계라고 생각하는 순간 창조적 변화는 멈추게 된다. pp.396-397

    10. 열역학 제2법칙인 엔트로피에 의하면 모든 쓸모 있는 에너지는 온도의 차이에 의해서만 만들어진다. 우주에서 생명이 가능한 것도 최초 빅뱅의 뜨거운 폭발에서부터 점점 식어 가는 우주 사이의 온도 차이에 의해서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온도 차가 없으면 에너지가 없다. 에너지가 없으면 창조와 생명도 불가능하다. 과학자들은 수백억 년이 지나고 나면 우주가 전체적으로 같은 온도의 차가운 상태가 되고, 그러면 시간도 멈출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시간은 무질서의 정도를 말하는 엔트로피가 늘어나면서 부수적으로 만들어지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모든 창조는 온도 차에 의해서 시작된다. 인간 사회 안에서 온도 차이를 만든 것이 농업이다. 농업혁명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계층과 부의 온도 차이를 만든 것이 농업이다. 농업혁명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계층과 부의 온도 차이를 만들어 내자 인간은 새로운 창조가 가능한 문화적 에너지를 만들 수 있었다. 계급의 차이는 갈등의 근본적인 문제지만 냉정히 말해서 문명 발생을 촉발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계급 차이가 계속 존재해야 창조적인 사회가 된다는 말은 아니다. 차이에 의해서 나오는 흐름이 창조를 만드는 것이니, 사회의 계급이나 부가 고착되면 차이에 의한 흐름이 정체되고 사회는 쇠퇴한다. 따라서 공정하고 평화적인 방식으로 사회 계급 간의 자리 배치의 변화가 많은 것이 사회 발전의 에너지를 만든다고 볼 수 있다. 현대 사회에서 계급 간의 이동이 없어져 가고 있다는 점은 발전의 에너지가 소실되고 있다는 중대한 문제다. p.8

    11. 유전공학적 관점으로 비유해 본다면 다른 문화 간의 교류와 융합은 다른 품종의 교배로 볼 수 있다. 자연에서 각각의 생명은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진화하고 이종 간 교배를 통해서 선택된 우성 유전자를 후대에 남긴다. 이러한 우성 유전자를 가진 혼합종을 만들기 위해 자연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 성을 만들었고, 서로 다른 성이 만나 매 세대마다 다른 유전자 조합을 만들도록 했다. 문화도 마찬가지다. 다른 지역에서 발전한 문화는 이종 교배를 통해서 2차적인 창조를 만들고 그렇게 다음 세대의 문화가 탄생한다. 이렇듯 문화의 진화 과정은 생명체의 진화 과정과 동일하다. pp.11-12

     

    12. 공자, 노자, 석가모니의 영향으로 동양 문화의 가치 체계는 관계비움이라는 두 개의 키워드로 특징지을 수 있다. p.103

    13. 기차 레일의 폭은 마차 바퀴 폭에 따라서 결정됐다. 마차 바퀴의 폭은 마차를 끌기 위해서 필요한 두 마리 말의 엉덩이 폭을 합친 너비다. 우리가 쓰는 기찻길 폭은 말 엉덩이 폭에 의해 결정됐다는 얘기다. 엔진이 끄는 기차가 이 폭을 유지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도시에서 말 엉덩이 폭같은 고정관념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때다. p.378

    14. 인간다움이 어디에서 오는지 살펴보려면 모든 것이 급격하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변하지 않는 것을 구별해 내는 눈이 필요하다. 앞으로 사회도 변하고 가치관도 변하고 인간다움도 변할 것이다. 하지만 과연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일지 생각해 본다면 우리 자신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p.405

     

    15. 역사 속에서 새로운 생각은 위기와 다름에서 시작했다. 위기와 다름은 보통 갈등과 충돌을 야기한다. 그런데 갈등과 충돌이 있다고 자동적으로 새로운 생각이 만들어지지는 않는다. 새로운 생각은 갈등과 충돌을 화합시키려는 마음이 있을 때 만들어진다. p.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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