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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정홍택 옮김-소설/국외 2023. 12. 8. 12:55
1. 모든 인간의 생활은 자신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고, 그 길을 가는 시도이며 좁은 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그 자신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으로는 그 자신이 되어 보기 위해 어떤 사람은 다소 우둔하게, 또 어떤 사람은 보다 명석하게, 자기의 힘이 닿는 만큼 노력한다.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누구라도 자신의 출생의 잔재를, 태고 적의 정액과, 알의 껍질을 마지막까지 끌어안고 있다. 끝끝내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 개미에 머물러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머리는 사람이지만 몸은 물고기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누구나 인간을 향해 던져진 자연이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난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심연으로부터의 한 시도이며 던져진 존재인 개개의 인간은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노력한다. 우리들은 서로를 이해할 수는 있다. 그러나 사람은 누구나 자기 자신 밖에 해명할 수 없는 것이다. p.9
2. 가을이 되면 나무에서 낙엽이 떨어져 주위에 쌓이기 마련이었지만 나무는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비가 나무를 적시고 혹은 햇빛이 혹은 서리가 내리고, 나무의 내부에서는 생명이 서서히 위축되고 깊숙이 움츠러든다. 그러나 나무는 죽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림인 것이다. p.86
3. 나는 내 자신을 스스로 파멸시키는 미치광이의 소굴에서 살면서 친구들에게는 대장이니, 근사한 녀석이니, 비상하게 날카롭고 재치가 있는 녀석이라고 인정받고 있었지만 내 마음의 가장 깊은 곳에는 불안에 휩싸인 영혼이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언젠가 일요일 오전에 주일 예복 차림으로 명랑하고 즐겁게 놀고 있는 어린 아이들을 보았을 때 돌연 눈물이 솟아나오던 일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누추한 주막의 더러운 탁자에 기대어 맥주에 취해 낄낄거리면서 터무니없이 방탕한 말들로 친구들을 웃기고 때로는 놀리고 있는 동안에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남몰래 내가 조롱하는 모든 것에 대한 공경심을 품고 있었으며 나의 영혼 앞에, 나의 과거와 어머니 앞에, 그리고 신 앞에 울면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p.95
4.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애쓴다. 알은 새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안 된다. 새는 신을 향하여 날아간다. 그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다.” p.116
5. 그러나 본래 우연이란 없는 것이다. 무엇인가를 간절히 필요로 했던 사람이 그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연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자기 자신의 소망과 필연이 그것을 가져온 것이다. p.124
6. 그것들은 자기의 나름대로의 뜻을 나타낼 것이오. 모든 것이 의미를 지니고 있으니까요-혹시 당신에게 정말로 미친 생각이나 죄를 범하고 싶다는 생각이 떠오르면, 싱클레어, 혹시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진다거나 말도 되지 않는 추잡한 일을 저지르고 싶으면 잠깐 동안이라도 아프락사스가 당신의 내부에서 그렇게 공상하고 있다고 생각하시오! 당신은, 당신이 죽이고 싶은 어떤 사람은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겉껍데기에 불과한 것이고, 우리가 어떤 사람을 미워한다고 하는 것은 그의 형상 속에서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숨어 있는 그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그것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오. 우리들 자신의 내부에 존재해 있지 않는 것은 진정으로 우리를 흥분시킬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오! p.144
7. 그의 말이 아무리 옳은 말일지라도 그 이야기를 무작정 전해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자신의 체험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면, 또 내 스스로가 그것을 준수해 볼 수 있을 만큼 성숙한 다음이 아니면 함부로 충고를 해줄 수 없는 것이다. p.149
8. 어떻게 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그런 말을 조금도 나쁜 의미에서 한 것은 아니었고 파국이 오리라는 예감 같은 것은 느끼지도 않았었다. 내가 이야기하고 있는 그 순간조차도 전혀 스스로 잘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지껄였던 것이다. 나는 단지 약간 재치있고 약간은 심술궂은 충동에 따랐을 뿐이건만, 그것이 운명적인 일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나는 사소한 부주의로 행동을 한 것인데 그에게는 그것이 심판이 되어 버린 것이었다. p.161
9. 이삼 주일 후 나는 H대학에 입학을 했다. 그러나 만사가 다 나를 실망시켰다. 내가 수강한 철학사 강의는 공부하는 학생들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허무하고 기계적이었다. 모든 것이 너무나도 판에 박은 듯이 일정했고, 서로들 똑같이 행동하고 소년티를 벗지 못한 얼굴에 나타나는 과장된 쾌활성은 너무나 암담하게 공허하여 구입한 완제품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나는 자유로웠다. 온종일을 나를 위해서 바치면서 교외의 낡은 집에서 조용하고 안락하게 지냈다. 내 책상 위에는 니체의 낡은 책이 몇 권 놓여 있었다. 그와 더불어 살고, 그의 영혼의 고독을 느끼며 그를 그토록 쉴 새 없이 몰아낸 숙명을 느끼며 그와 더불어 괴로워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엄격하게 자기의 길을 걸어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기뻐했다. p.170
10. 인간은 서로에 대해 두려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품으로 도망해오고 있는 거야. 신사는 신사들끼리, 노동자는 노동자끼리, 학자들은 학자들 끼리 말이야! 그런데 왜 그들은 두려워하는 것일까? 사람은 흔히들 자기 자신과 일치하지 않을 때에 두려움을 느끼지.
그들은 결코 자기 자신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두려움을 느끼는 거야. 내부의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품은 자들만의 공동체라니! 그들은 모두 자신의 인생의 법칙이 더 이상 오늘날을 살아가는데 적합하지 않다는 것과 자기들이 쫓아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로마 시대의 동판법과 같은 낡은 것이라는 것과, 그들의 종교도 도덕도 어느 것 하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에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느끼고 있는 거야. 유럽은 수백 년간, 아니 그 이상의 시간 동안 그저 연구나 하고 공장만 세우고 있었거든! 한 사람의 인간을 죽이기 위해서는 몇 그램의 화약이 필요한지는 정확히 알고 있지만 신에게 기도를 드릴 줄도, 한 시간만이라도 즐겁게 보낼 수 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는 거야. pp.174-175
11. “불안에 가득차서 모여든 사람들은 더욱이나 겁을 먹고 악의에 차 있으며 어느 누구도 믿으려 들지 않는 거야. 그들은 이상이 아닌 이상에 집착해서는 새로운 이상을 세우는 모든 사람들에게 돌멩이를 던져대는 거야. 아마도 싸움이 시작되리라는 것을 느껴. 그것이 올 거야. 머지않아 틀림없이 올 거야! 물론 그것이 세계를 ‘개선’하지는 못 할 거야. 노동자가 공장주를 때려죽이거나 러시아와 독일이 서로 총질을 한다 해도 단지 소유주만 바뀔 뿐이겠지.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것이 헛된 일이라는 건 아냐. 오늘날의 이상의 무가치함을 증명해 줄 것이고 석기 시대의 신들을 제거해줄 테니까. 지금의 이 세계는 바야흐로 죽어가고 있는 거야. 이 세계는 멸망하고 있으며 또 멸망하고 말 거야.”
“그럼 그땐 우리는 어떻게 될까?” 내가 물었다.
“우리가? 아, 어쩌면 우리도 함께 멸망할는지도 모르지. 우리와 같은 자들도 맞아 죽을 가능성이(...) 그러나 우리는 단지 그런 식으로 끝나지는 않을 거야. 우리들에게서 남겨진 것이나 우리들 가운데서 살아남은 자의 주위에 미래의 의지가 결집될 거야. 유럽이 얼마동안 기술과 과학이라는 시장으로 요란스럽게 눌러 덮었던 인간성의 의지가 결국엔 나타나게 되겠지. 그렇게 되면 인간성의 의지란 결코 국가나 민족, 단체나 교회 같은 오늘날의 공동체와는 다르다는 것이 확연히 드러나게 될 거야. 자연이 인간에게 요구하는 바는 오히려 각 개인의 마음속에, 자네나 나의 마음속에 새겨져 있는 거야. 그것은 그리스도의 마음속에도 적혀 있었고 니체의 마음속에도 적혀 있었지. 이 중요한 흐름을 위해서는-물론 그것은 매일 다르게 보일 수도 있는 것이지만, 오늘날의 공동체가 붕괴되어 버릴 때에만 나타날 여지가 생길 거야.”pp.175-176
12. 어디서나 똑같았다! 어디서나 그들은 자기 자신의 책임을 상기하게 되고, 자기 자신의 길을 가도록 요구를 받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때문에 자기의 과거 시절 어느 곳에서의 ‘자유’를 찾고 ‘행복’을 찾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이삼년간 폭음을 하고 환성이나 내지르다가 기어들어와서는 관청의 근엄한 관리가 되는 곳이었다. p.176
13. “사랑은 구걸해서는 안 되는 거예요.” 그녀는 심각하게 말했다.
“또 요구해서도 안 되지요. 사랑은 자신의 내부에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힘을 갖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끌려오는 것이 아니라 끌어당기게 되는 거지요. 싱클레어, 당신의 사랑은 나에 의해서 끌리고 있어요. 당신이 나를 끌어당기게 되면 나는 가겠어요. 나는 아무런 선물도 드리고 싶지 않아요. 당신에게 획득 당하고 싶은 거예요.” p.192
14. 하늘의 모든 별들은 그의 내부에서 타올랐고 그의 영혼을 통해 환희의 불꽃을 튕겼다-그는 사랑을 하였다. 자기 자신을 발견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를 잃어버리기 위한 사랑을 하는 것이다. p.1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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