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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말고 파리로 간 물리학자> -이기진-비소설/국내 2023. 12. 19. 10:36
1. 베르제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난다. 그는 어떻게 이브 생 로랑을 추억했을까? 베르제는 “서커스의 천막은 내려졌고 나 혼자만이 기억의 가방을 들고 서 있다”라고 이브의 부재를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그는 아직도 살아 생전 이브에게 하지 못한 말들을 편지에 쓰고 있다고 했다. 베르제 당신에게 지금 현재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이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멋진 예술작품이나 압도적으로 아름다운 풍경 앞에서 ‘이걸 봐봐’라는 말을 할 사람이 곁에 없다는 것.” pp.94-95
2. 제랄은 몇 해 전 부인을 병으로 잃었다. 그는 세 명의 아들이 있고 두 명은 결혼을 했다. 얼마 전 큰아들은 딸을 낳았으나 이혼을 했다. 둘째도 이혼을 했다. 막내는 제랄과 같이 살고 있다. 가족사의 내면을 자세히 들여다볼 이유는 없다. 현재 모습이 가족의 최선이다. 한 가지 더, 현재를 굳건하게 받쳐주는 사람들을 보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p.99
3. 나는 비가 오기 시작하는 그 순간이 좋았다. 창문을 열고 어둠 속에서 빗소리를 들었다. 방 안에서 그 빗소리를 듣고 있으면 보호받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식탁을 비추는 소듐 전구의 불빛, 어두운 부엌의 높은 천장, 어지럽게 놓인 부엌의 도구들, 창밖에 놓인 녹색 식물. 파리에서 가장 행복한 풍경이었다.
겨울엔 잠들기 시작할 즈음에 비가 자주 왔다. 신기하게도 깨어나기 전에 비가 그치는 날이 많았다. 밤새 비가 내리다 그치고 맑게 갠 아침 7시, 빵을 사러 가는 길이 행복했다. 기분이 좋았고 모든 신경이 충만해진 느낌이었다. 깃털 하나만 올려놓으면 기울어지는 저울추처럼 몸과 마음이 가벼웠다. 이런 날 파리의 아침 공기는 어느 누구도 한 번도 숨을 내쉬지 않은 공기의 맛을 가지고 있었다. p.170
4. 같은 시대에 같은 노래를 들으며 감정을 교류할 수 있는 멋진 친구가 사라졌다. 가슴속으로부터 슬픔이 밀려 올라왔다. 죽음은 이렇듯 타인으로부터 느껴진다. pp.231-232
5. 가난의 시간은 잠시일 수도 있다. 아니면 지나가는 시간 혹은 과정일 수도 있다. 어떠한 어려운 시간도 머물지 않는다. 흘러간다. 삶의 일시적 부조화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pp.309-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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