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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술과 바닐라> -정한아-
    소설/국내 2023. 12. 19. 14:08

     

     

    1. 온통 새것인 집 한가운데서 그녀는 홀로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시간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p.61

    2. 당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 당신의 쓸모가 다했다는 말. 그런 말을 하고, 또 듣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했다. p.63

    3. 방송사와 제작사 측은 내게 빨리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입장을 밝히라고 했다. 나는 변명이나 해명을 해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내가 저쪽의 시나리오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도 없을뿐더러, 저쪽에서 공개한 증거라는 게 헐거운 얼개만 있는 시놉시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불씨를 키우는 것이야말로 저쪽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 말도 듣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중에야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이었는지 깨달았다. 세상이 얼마나 많이 우연에 의해 좌우되는지 그때는 몰랐다. 그로 인한 불리함을 겪어본 적도, 내쳐짐을 당해본 적도 없었던 것이다. p.67

    4. 약국 문을 닫고 처음에 나는 그간 못한 일들을 하는 데 온 힘을 쏟았다. 직접 식구들의 식사를 준비하는 일, 집안 구석구석 먼지를 닦아내는 일, 휘의 숙제를 봐주는 일…… 나는 아침에 일어나 시간표를 만들고 그에 따라 움직였다. 몸이 바쁘니 잡생각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한 번도 내 것으로 누려본 적 없던 부엌에서 느끼는 만족도 있었다. 아이에게 간식으로 핫도그를 만들어주고, 그것을 다 먹는 동안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다.

     하지만 한 달쯤 지나자 모든 게 가짜처럼 느껴졌다.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집안에서 동동거리며 돌아다니는 나 자신에게 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매일 베갯잇을 삶아 햇볕에 말리는 내가, 직접 생선의 내장을 제거하고 손질하는 내가, 휘에게 끝도 없이 긴 책을 읽어주고 있는 내가 낯설게 느껴졌다. 가짜인 나를 진짜인 내가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p.95

    5. 아이들은 그녀의 모든 것을 원했다. 그녀의 생명력을 뿌리째 빨아들이기를 원했다. 그녀는 아이들 앞에서 항복하듯 빈 손을 내밀고 싶었다. 아무도 자신을 모르는 곳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p.186

    6. 삶에서 내쳐진 자의 성마름과 초조함이 노인의 몸집에서, 말투에서 배어나왔다. p.207

    7. 당시 나는 할머니가 암 말기 환자라는 것도, 진통제로 죽음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사실을 알았더라면 떠나지 않았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그때 나는 미쳐 있었으니까. 늙은이가 내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면, 아마 발로 뻥 차고 뛰쳐나갔을 것이다. 미친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pp.214-215

    8. 엄마인 나와 작가인 나는 매 순간 충돌해요. 혼자였을 때는 전적으로 글쓰기에 몰입하며 살았다면, 아이를 기르면서는 그 몰입이 매 순간 깨지는 것을 느끼거든요. 그런 스스로를 미워하고, 포기하고, 또다시 독려하고…… 실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계속하는 거죠. p.255

    9. 이 시대의 정언명령은 ‘너 자신이 되라’인데 ‘엄마 되기’는 그와 정반대라는 생각이 들어요. 엄마 되기는 내가 되면 안 돼요. 나 자신이 되는 순간 아이들이 대가를 치르니까. p.259

    10. 최근에 ‘엄마됨’에 대해 긍정적으로 그리는 서사가 거의 없는데 나부터도 그게 달갑지는 않았어요. 엄마로서의 나는 이렇게 소모되고 착취당하고 있어, 라는 뉘앙스들이 굳어진 정서가 돼버릴까봐 두렵기도 하거든요. 엄마가 됨으로써 얻어지는 새로운 감각-관계 맺음을 통한 시야의 확장, 유연함이라는 무기, 물리적 삶의 극복이라는 측면이 분명히 있으니까요. (...) 행복이라는 것이 꼭 쾌감, 불쾌감의 두 가지 감각만으로 가늠되는 것은 아닐 거예요. 아주 복합적이고, 세밀하고, 또 매 순간 새로운 것이죠. 삶도 같을 거예요. pp.273-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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