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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데 예뻐서> -박조건형, 김비-비소설/국내 2023. 10. 25. 10:09
1. 사랑을 하다 보면, 그때 그 마음들이 시간에 뭉개져 보일 때가 있다. 김이 서린 창문처럼 말이다. 아무리 팔꿈치로 문질러도 더 흐릿해지는 것만 같다. 나 역시 지금은 그때의 그 순간들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반짝거렸던 햇살과 순수했던 마음들을 오래된 사진 한 장처럼 붙들고 있긴 하지만, 얄팍하게 만져지는 기억들이 이따금 초라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너무 멀리 와 버린 지금, 다툼과 섭섭한 마음이 쌓이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사랑을 시작하는 순간 사랑은 늙어가고, 사랑이란 원래 변하는 거라고 인정해 버리면 간신히 붙들고 있던 그 모든 사랑의 기억마저 훼손되는 것 같기 때문에, 방법은 없다. 매일 그 사람을 새로이 사랑하는 수밖에. 기억하고 쓰고 그리며 내일 다시 또 사랑해야 하겠구나. 늙어가는 우리 사랑을 끌어안는 수밖에. p.70
2. 믿을 수 없는 사랑을 하고 믿기지 않는 결혼이란 걸 하고, 다시 그때의 사랑을 과연 믿을 수 있을까. 슬그머니 나도 모르는 의혹이 고개를 든다. 사랑이 돈이 되고, 사랑이 집이 되고, 사랑이 관계가 되고, 사랑이 양육이 되어가는 이 시대에 우리 두 사람은 서로만 사랑했던 것 같다. 모두의 사랑이 그러하듯 우리들의 사랑 역시 지금은 그 모양이 많이 달라졌지만 그럼에도 그때의 사랑을, 지금의 사랑을 부인하지 않는다. 여기에 있는 우리가 그때의 우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지워 버릴 수 없는 것처럼, 사랑 역시 단지 나이 들고 있을 뿐 ‘사랑’의 이름 그대로일 테니까. pp.81-82
3. 남편의 노동에, 아내의 노동에, 우리는 얼마나 많은 관심을 두고 있을까? 혹시 통에 찍히는 숫자 몇 개로만 그 의미를 파악하며 이해하고 있는 건 아닌지. p.173
4. 신랑의 퇴근 시간은 오후 5시. 하지만 오전 7시까지 출근해야 하기에 6시에 집을 나선다. 신랑이 이 직장을 택한 것은 그나마 오후에 한 시간이라도 일찍 끝난다는 것과 격주로 토요일마다 나가지 않아도 되기 때문.
그러나 쉬는 토요일이 껴 있는 주에는 평일 잔업이 많아 밤 9시를 넘겨 들어올 때가 많았고, 법정 공휴일에 일해야 하는 날도 많았으니, 격주 주 5일은 그저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었다.
대부분 중소 생산직의 현실이 그렇다고 했다. 매년 각종 포털 사이트에서는 일 년 중 공휴일 수를 하루 이틀 따져 보며 일희일비하지만, 어떤 노동자들에게는 그저 다른 세계에 사는 것 같은 박탈감만 주는 소식일 뿐. 그들에겐 그저 술 한 잔으로 위로해야 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여기 이곳의 현실이라고, 신랑은 말하곤 했었다. 온종일 땀에 전 몸 하나 편안히 씻을 공간조차 없는 것이, 2018년 대한민국 노동 현장의 시간이라고. p.184
5.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라는 말이 있다. 나도 학원에서 아이들을 오래도록 가르쳤었고 사장이나 다름없는 학원장 곁에서 학생과 학원장 사이, 학부모님들과 학원장 사이를 조율하는 일을 해보기도 했는데, 정말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시선은 180도 달라진다. 모두가 만족하는 결과를 도출하기란 쉽지 않아 “논의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필수”라고 말하는 것 같다. 누구는 높은 자리에 앉고 누구는 낮은 자리에 앉아 말뿐인 토론이 아니라, 하나의 공간과 노동을 공유하는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 보는 토론과 논의 말이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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