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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개> -김훈-
    소설/국내 2023. 12. 27. 13:57

     

     

    1. 15년여 전의 글이 낯설어 보이니, 마음이 세월과 더불어 늙었음을 알겠다. 마음이 늙으면 나 자신과 세상이 흐리멍덩하고 뿌였다. 개념의 구획이 무너진 자리에 작은 자유의 공간이 생겨나는데, 늘 보던 것들이 처음으로 보여서 놀란다. (개정판 서문 中) p.6

    2. 노는 아이들 곁에 가서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의 몸속에서 피가 돌아가고 숨이 들고 나는 소리가 들렸다. 운동장 가득 아이들이 뛰어놀 때 그 소리는 다 합쳐져서 바람이 잠든 날에도 봄의 숲이 수런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이들의 몸속을 돌아가는 피의 소리는 작은 냇물이 바위틈을 빠져나올 때처럼 통통거렸고 숨이 드나드는 소리는 어린 대숲 속으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는 것처럼 색색거렸다. 작지만 또렷한 소리였다. p.99

    3. 나는 싸울 때는 짖지 않는다. 싸우려고 달려들 때도 짖지 않는다. 싸울 때는 입이 바빠져서 짖어댈 틈이 없다. 싸울 때 짖으면 문 데를 놓치기 쉽고 한번 놓치면 다시 물기가 어렵다. 다시 물지 못하면 내가 물린다.

     싸울 때는 입을 벌려서 짖지 않아도 몸속에서 으렁 으렁 으렁 소리가 저절로 나온다. 싸울 때 내 마음은 미움으로 가득 차서 슬프고 괴롭고 다급하다. 싸움은 혼자서 싸우는 것이다. 아무도 개의 편이 아니다. 싸우는 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롭다. 싸울 때, 미움과 외로움은 내 이빨과 뒷다리와 수염으로, 내 온몸으로 뻗쳐 나온다. 으렁 으렁 으렁 소리는 그 외로움과 슬픔이 터져 나오는 소리다. 화산이 터지기 전에 땅 밑에서 용암이 끓는 소리와도 같다. 싸움은 슬프고 외롭지만, 이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다. 자라서 다 큰 개가 되면 그걸 알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은 끝내 피할 수 없다. pp.114-115

     

    4. 청소하다 말고 물동이의 물을 서로 끼얹으며 장난치던 일이학년들은 영희가 가까이 오면 모두 깔깔 웃어 대며 달아났다. 장난칠 때 일이학년들은 다람쥐처럼 빨랐고 종달새처럼 재재거렸다.

     앞발을 창문틀에 올리고 사람처럼 뒷다리로 서서 교실 안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정말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내가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은 내가 달을 밟을 수 없는 것과 같았다. 내가 사람의 아름다움에 홀려 있을 때,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고 있었다. p.124

    5. 비 오는 날은 나무와 풀들, 바다와 산들, 그리고 살아서 움직이는 모든 것의 깊은 안쪽에 숨겨져 있던 냄새들이 밖으로 배어 나온다. 그 냄새는 짙고 또 무거워서 낮게 깔린다. p.144

    6. 겨울의 바람은 투명하다. 겨울에는 산과 들과 나무에서 물기가 빠져서 세상은 물씬거리지 않는다. 부딪치며 뒤섞이던 습기들은 땅속이나 나무들 속 깊이 잠겨서 밖으로 나오지 않고, 세상이 텅 빈 것처럼 콧구멍에 걸려드는 것이 없다. 그래서 쨍하게 추운 겨울날에는 멀리서 다가오는 작은 소리가 가늘고 곧게 퍼진다. 겨울에는 가느다란 소리들이 선명해진다. p.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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