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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발굴지에 있었다> -허수경-비소설/국내 2023. 11. 23. 11:11
1. 발굴지에서 독일로 돌아오는 길에는 언제나 가을빛이 짙어지고 있다. 그 여름 햇빛은 3, 4일가량 차를 타고 오는 길에 어디다 버려두었는지, 지중해를 지나서 알프스를 넘어 중부 유럽으로 들어서면 어느덧 빛은 잠 속에서 낙낙하게 옹알거리는 착한 아기처럼 자물거리고 있다. 가을빛 아래 스산거리는 나무들, 아직도 빛을 잃지 않은 여름꽃들, 그러나 빛은 여름의 시간을 잃고 있다. 그리고 나는 내 눈에 익숙한 빛을 잃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 여름 내내 내 눈에 익숙한 빛은 사납고 거세고 나의 모든 구석을 달구는, 그리하여 그 빛에 나라는 ‘것’을 드러낼 수밖에 없는 폭력이었다. 폭력의 빛은 그 여름 내내 나를 그의 벗으로 만들었다. 그 빛 아래, 드러난 작은, 허물어진, 몇 개의 토기 파편만을 남긴 그 집터는 마지막 숨을 다하는 양, 빛 아래에서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 집터는 몇천 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pp.8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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