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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골든아워 2> -이국종-
    비소설/국내 2023. 11. 29. 09:57

     

     

     

    1. 빈소를 찾아온 이들은 영안실 밖 흡연 구역에서 삼삼오오 모여 담배를 피웠다. 입과 입에서 새어 나오는 연기는 슬픔과 허망을 안고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부모를 따라왔을 뿐인 아이들은 조문의 의미를 모른 채 해맑게 뛰어 놀았다. 사멸해버린 생으로 부서지는 울음과, 피어나는 생으로 번지는 웃음은 멀고도 가까웠다. 나는 삶과 죽음 사이의 무한한 연속성을 헤아려보려 했으나 그 깊이에 닿을 수 없었다. pp.9-10

    2. 미안한 얼굴들이 계속 떠올랐다. 많은 생각들이 교차되었으나 그 어떤 결론에도 닿지 못했다. 가장 쉬운 결말은 누군가 나서서 내 일의 종료 시점을 정해주는 것이리라. 내게 맡겨놓은 한 나는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할 것이고, 이 일을 지속하는 한 나는 위험한 상황을 좇는 본능에 따라 또다시 움직일 것이다. 나는 단지 내가 잘하고 있는 것인지를 알고 싶었다. 그러나 어떤 답을 들어도 무엇도 선명해지지는 않을 것 같았다. pp.41-42

    3. 세월호 침목을 두고 드물게발생한 국가적 재난이라며 모두가 흥분했다. 나는 그것이 진정 드물게 발생한 재난인지, 드물게 발생한 일이라 국가의 대응이 이따위였는지 알 수 없었다. 사람이든 국가든 진정한 내공은 위기 때 발휘되기 마련이다. p.93

    4. 나는 왜 주위 사람들에게까지 이 짓을 강요해야 하는가. 몸이 한없는 바닥 아래로 끌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동료들이 두말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나서고 있는 것도, 노골적으로 내 일을 꺾어버리려는 이들의 저항을 버텨 나가는 것도 지긋지긋했다. 나는 구토감을 느끼면서 창밖을 한참 멍하게 바라보았다. 몹시 피곤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자러 가고 싶었으나 손가락 하나 까닥할 수 없었다.

     시간은 새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대로 자리에 처박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빗줄기로부터 시선을 돌리지 못했다. 어둠을 타고 내린 빗방울은 눈앞에서야 실체를 드러내며 제각기 다른 속도로 낙하했다. 나는 빗방울의 무기력한 추락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무수한 우적(雨滴)들이 바닥과 충돌해 으스러지는 소리가 내 몸을 후려치며 휘감았다. 어디론가 도망가야 한다는 것은 분명한데, 갈 곳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p.100

    5. 나는 낡은 내 군화 표면의 균열을 보며 우리 팀 내부에서 일어나는 균열의 조짐을 생각했다. 군화의 균열은 구두약으로 없앨 수 있으나, 사람으로 인한 균열은 없애기 어려웠다. p.134

    6. 돌아보면, 모르는 척 덮지 못하고 파고들어 복잡하게 얽혀 들어가는 것은 결국 내 선택에서 기인했다. 지금까지의 많은 일들이 그러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런 내 모습이 때로는 나조차도 부담스러웠다. 외상외과 의사로서 내 원칙을 버리지 못했고, 다른 길은 알지 못해서 스스로를 진창 속으로 밀어 넣는 일을 나는 좀처럼 멈추지 못했다. p.151

    7. 나는 간호사들의 업무 강도를 모르지 않았고 그들을 위한 시스템 수준이 조금도 높아지지 않은 것도 알았다. 그러나 계획된 외상센터의 순환근무제는 중환자실 내에서 구역만 달리해 순환이동하는 것이고, 그로써 40병상 전체 운영에 대한 폭넓은 시야를 갖출 수 있었다. 당장은 낯선 시스템이 버거울 수 있지만 시간이 지나면 간호사 개인의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었다.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기저에 깔린 뜻을 당사자들이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면 할 수 없는 일이다. p.180

    8. 일부 정치인들이 특별히 생각하는 노동자들 대부분이 몸을 써서 먹고살았고, 몸으로 먹고사는 노동자들은 일하다 사고로 으스러져 죽어가곤 했다 .이런 이들에게 선별적 의료 혜택을 주려면 중증외상 분야를 보완해야만 했다. 그러나 말로 먹고사는 이들은 몸으로 먹고사는 이들의 삶을 깊이 알지 못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끼리 말의 잔치만 벌이며 노동자들을 위한 정책을 논했으므로, 그들이 만들어내는 정책은 실제 노동자들에게 가닿지 않았다. 부서지고 찢겨져 죽어나가는 노동자들을 눈앞에서 보는 나는 그렇게 느꼈다. p.224

    9. 외상센터 건물 옥상에 조그맣게 정원을 만들었다. 시설팀 김성수 과장이 조경에 신경을 많이 썼다. 내가 캔사스산 외래종 잔디를 조금 심었는데, 겨울에도 색이 푸르게 유지됐다. 수수꽃다리와 겹황매화처럼 봄여름에 꽃이 피는 화초들이 함께 있어서 더 보기 좋았다. 팀원들이 이곳에 와서 한숨 돌릴 수 있기를 바란다. p.267

    10. 사람은 모두 늙어가는 것과 그 끝에 있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만성질환으로 병치레하기 마련이고, 수많은 의료인들은 거기에 기대 생계를 유지한다. 각종 뉴스에 암, 알츠하이머, 당뇨 등에 탁월하다는 기적 같은 약품이 보도될 때마다 나는 신기루를 보는 것 같았다. 의사들이 더 잘 안다. 나이를 먹으면 얼굴이 늙어가듯, 몸의 내장기관들도 낡고 고장 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인간은 대체 부품이 없는 존재다. 고장 나고 문제 있는 장기들을 갈아 치우지 못하므로 약발로 보완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만성질환은 노화와 죽음으로 가는 자연적인 과정이어서, 재원을 아무리 쏟아부어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다. 개발도상국의 평균수명과, 엄청난 의료비를 쏟아붓는 선진국들의 평균수명을 비교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p.267

     

    11. 대부분의 정당이 노동자와 농민을 위한다고들 했다. 그들이 말하는 노동자에 외상센터에서 일하는 우리는 없었다. 한국 중증외상센터의 직원 고용 수준은 영미권의 3분의 1에 불과했고, 적은 인력이 과도한 업무를 감당하느라 과로로 쓰러져나갔다. 수술방의 모든 의료진이 감염의 위험을 감수하고 환자의 피를 뒤집어썼다. 전담간호사들이 다치거나 유산해 대열에서 떨어져나갔다. 그러나 이 현실은 무관심 속에 외면받고 있었다. 이곳의 노동자들은 무슨 이유로 희생을 기본 값으로 감수해야만 하는가.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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