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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
    소설/국내 2023. 12. 7. 13:10

     

     

     

    1.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적을 베지 못하면 내가 죽을 차례다. 칼이 적 앞에서 헛돌았을 때 나의 전 방위는 적의 공세 앞에 노출된다. 이때 수세를 회복하지 못하면 적의 창이 내 몸에 꽂힌다. 나의 공세 안에 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고 적의 수세 안에 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다. 적 또한 이와 같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생사는 명멸한다. 휘두름은 돌이킬 수 없고 물러줄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다. 모든 휘두름은 닥쳐오는 휘두름 앞에서 덧없다. 수와 공은 다르지 않고 공과 수는 서로를 포함하면서 어긋난다. 모든 공과 모든 수는 죽음과 삶 사이를 가른다. pp.22-23

    2. (...) 땅에 뿌리를 박고 올라오는 푸른 것들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땅이 스스로 밀어 올리는 숨결이라고 강남 사람들은 믿었다. p.29

    3. 사람의 마음속에는 뚜렷한 것도 있고 희뿌연 것도 있는데, 희뿌연 것들은 문자로 잘 가꾸면 뚜렷해질 수 있다고 글 하는 자들은 말한다. 단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오락가락하는 것들, 간절히 옥죄는 것들, 흐리게 떠오르는 것들을 글자로 적어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는데, 글자가 글자를 낳아서 글자는 점점 많아졌다. 단은 그 글자들이 세상의 시간과 공간 속에서 실체를 드러내게 될 것으로 믿었다. 글자의 뜻을 이룩하려는 오랜 세월 동안 글자들끼리 부딪치면서 많은 피가 흘렀고 피 안에서 또 글자들이 생겨났다. p.33

    4. 금붙이로 곡식이나 땅을 사고팔게 되면 곡식도 땅도 아닌 헛것이 인간 세상에서 주인 행세를 하게 되고, 사람들이 헛것에 홀려 발바닥을 땅에 붙이지 못하고 둥둥 떠서 흘러가게 되고, 헛것이 실물이 되고 실물이 헛것이 되어서 세상은 손으로 만질 수 없고 입으로 맛볼 수 없는 빈 껍데기로 흩어지게 될 것이라고 선왕들은 근심했다. pp.193-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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