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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관의 일> -송민경-비소설/국내 2023. 12. 28. 12:27
1. 법관이 법의 관점을 고수하는 이유도 이와 비슷하다. 바로 법이 우리 모두가 정한 계획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법은 일종의 사회적 계획이다. 우리가 직접 법을 만들지 않았어도, 의회가 민주적 절차를 거쳐 제정한 법은 우리가 함께 지켜야 할 공동의 계획이 된다. 그런데 계획이 지향하는 합리성은 실행 지점에 이르러 ‘또다시 생각함 없이(without reconsideration)’하기로 했던 바로 그것을 실행하는 데 있다. 만약 우리가 지적으로 완벽한 존재라면, 슈퍼컴퓨터처럼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수많은 변수들을 종합해 장래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있는 존재라면 굳이 힘들여 뭔가를 계획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행동의 시점에서 여러 대안들 중 어떤 행동이 가장 좋은 결과를 낳을지 예측해 행동하면 될 테니까. 하지만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높은 수준의 지성을 갖추고 있긴 해도 미래를 완벽히 예측하기에 역부족인 인지능력을 타고났기 때문에 계획을 세울 필요가 생긴다. 계획은 인간이 미래를 완벽히 예견하고 그에 맞추어 만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수립하는 게 아니다. 역설적으로 말해, 계획은 그러한 능력을 어느 정도 갖고 있기는 하되, 또 어느 정도 결여한 존재에게 유용한 활동이다.
물론 이런저런 이유로 약속을 하고도 막상 지키려 하면 난처한 경우가 생겨나듯이, 국회가 신중한 심의 과정을 거쳐 제정한 법률이라도 그대로 따르는 것이 불합리하게 여겨지는 경우도 분명 존재한다. 그럼에도 법관이 가급적 법의 관점을 따르고자 노력하는 이유는, 전체적으로 볼 때 그것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계획을 번복하거나 뒤집는 것은 전체 의사결정 구조의 합리성을 훼손하는 일이 되며, 그 자체로 비용과 대가를 치르게 된다. 한번 그러한 일이 용인되면 그다음부터는 계획을 세우고도 그에 따르지 않으려는 일이 잇따를 것이며, 결국 사회 전체의 비용이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늘어날 것이다. 때문에 계획이 조금 불합리하거나 어딘지 모르게 부당해 보이더라도 이미 정해둔 바를 따르는 일은 대체로 합리적인 일이 된다. pp.36-37
2. 법관이 우선 체득해야 할 직업윤리는 ‘자기 절제’의 윤리, 즉 법의 관점보다 자기 관점을 앞세우지 않으려는 겸손함이다. 법관이 판단을 ‘조금만’ 내리는 것은 법치주의에서 파생한 직업윤리에 바탕을 둔다. 시인 정현종의 시구처럼, ‘권력은 그 행사를 삼갈 때 힘차고, 그 삼가는 게 저절로 그렇게 될 때, 빛나고 아름다운 것’이 된다. p.40
3. 직업인, 그러니까 ‘프로페셔널’의 조건으로 소명의식, 전문지식, 직업적 책임감 등 여러 요소를 들 수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진짜’ 프로페셔널이란 일을 다루는 구체적인 방법을 아는 사람에 가깝다. 비장한 소명감과 책임감으로 단단히 무장된 프로페셔널도 존경스럽지만, 정작 나의 운명을 판가름할 무언가의 일을 맡겨야 한다면 자기 일에 조금 무덤덤하고 시니컬하긴 해도 일의 무게에 매몰되지 않고 그 일을 어떻게 다룰지 아는 프로페셔널을 찾아가고 싶다. p.43
4.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 생각하는데, 무얼 하지 말아야 할지 생각이 정리되면 자연스레 무얼 해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는 법이다. p.44
5. 칸트는 인간에겐 상호주관적으로 공유하는 공통감각이 있는데, 이 공통감각이 아름다운 대상에 의해 일깨워질 때 인간은 미를 느낀다고 보았다. 고로 미 개념이 미적 대상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미적 대상이 (공통감각에 근거해) 미의 개념을 환기시킨다. p.204
6. 당신 발밑에 난 시커먼 구멍을 이해하고 메울 책임 있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다. p.227
7. (그러니) 인생의 좋지 않은 시기가 닥치면 밥 잘 챙겨먹고, 잠이나 푹 자고, 되도록 아무 생각 말자. 생각한다고 딱히 뾰족한 수가 생기는 것도 아니며, 생각해서 떠오르는 묘수는 묘수가 아닐 가능서이 높다. 일단 버티고 살아남을 궁리부터 하자. (...) 그래도 아파서 죽었다시피 하다 살아난 다음날이면 세상이 달라 보이지 않던가. 세상이 좀더 깊고 차분한 색조를 띤 듯하고, 별것 아닌 일상이 고맙고 새삼스럽게 느껴지지 않던가.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일어난 일이 아무것도 아닌 건 아니지만,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p.258
8. 이제 ‘I’축을 경계로 ‘독서, 운동, 사색’의 내측과 ‘실행, 경험, 만남’의 외측으로 뚜렷하게 구획된 당신의 일상을 일종의 자석 같은 것이라 생각해보자. 자기 발전의 선순환 루프가 내장된 이 자석을 매일같이 회전시키면 어떤 일이 생겨날까. 놀랍게도, 자가발전이 일어난다. 이렇게 자가발전이 되면 삶의 방향이 잡히고, 동기가 부여되고, 추진력이 생기며, 이런저런 도전과 시도, 좌절과 실패 끝에 작은 성취를 경험하다가 결국 뜻하지 않은 순간에 삶의 결정적 변화를 맞게 된다.
나는 이러한 변화의 원리를 ‘자성의 원리’라고 부른다. 자성의 원리는 자기 발전의 꾸준한 반복을 통해 작지만 강력한 자성을 띤 자기주도적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자석 같은 존재는 늘 일정한 곳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철붙이와는 다르다. 자석의 양극이 항상 북극과 남극을 가리키듯, 내면의 나침반은 당신의 나아갈 곳을 조용하고 끈질긴 목소리로 일러줄 것이다. 자석 같은 존재는 일정한 방향 아래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지속적으로, 체계적으로 해내는 존재다. 목표와 방법을 아울러 갖춘 존재다.
물론 우리는 태어난 기질과 성격에 따라 그때그때 생겨나는 이런저런 관심을 갖고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그럴 때 우리의 기분과 감정, 생각은 절제되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채 이리저리 떠다니는 구름마냥 흘러간다. 잡다한 감정과 생각이 무심결에 말고 행동으로 이어지지만, 정제되지 않은 감정의 토로, 어쩌면 날 것의 배설에 가까운 것이 된다. 솔직함을 가장한 노골적 언어가, 격식을 제 편의대로 생략한 상스러운 몸짓이 된다. 이렇게 정돈되지 않은 거친 언행에 길을 터주면, 이내 그 사람의 습관과 성향으로 고착되기 쉽다. 이처럼 무질서하게 되는 대로 살아서는 자석 아닌 철붙이 같은 존재가 되기 쉽다. 삶의 불가피한 선행조건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거나 강한 자성의 존재에 이리저리 치이며 엉겨붙은 존재 말이다. pp.259-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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