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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트인문학-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
    비소설/국내 2023. 11. 3. 10:21

     

     

     

    1. 미술 흐름 잡기
     1) 중세까지의 미술
    고대의 그림 중 그리스 예술은 단연코 특별했다. 밀로의 비너스나 라오콘 군상 등. 조각가 피디아스나 화가 아펠레스 등의 이름이 지금도 전해진다. 유럽과 중동, 아프리카 북부에 걸쳐 대제국을 건설했던 로마는 건축과 토목 분야에서 위대함의 경지에 도달했지만 예술 분야에서만큼은 철저하게 그리스의 속국과 같았다.
     476년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서양엔 중세가 시작되었다. 중세는 종교의 지배를 받는 시기였다. 기독교는 다른 신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고대 신들의 모습을 담은 그림과 조각 모두가 파괴되어야 했다. 고대 건물이 있던 자리에 성당이 들어섰고, 이 성당엔 종교화와 성인의 조각들이 자리하게 되었다. 중세 전반은 동쪽의 비잔틴 양식이 발전한 시대였다. 모자이크와 황금 장식을 특징으로 하는 비잔틴 양식은 서쪽으로도 전해져 베네치아와 라벤나, 시칠리아 등에 눈부신 결작들을 남겨놓았다. 중세 후반이 되면 피사의 사탑으로 유명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시대를 지나 고딕 양식의 시대가 열린다. 뾰족한 첨탑과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특징으로 하는 고딕양식은 파리의 노트르담 성당과 생트 샤멜 예배당이 유명하며 밀라노 두오모 성당도 대표적 작품으로 손꼽힌다.
     중세의 그림과 조각은 미적인 아름다움은 배제하고 신앙심을 고취시킬 목적에만 적합하도록 제작되었다. 회반죽으로 벽면에 그리는 프레스코화와 계란 노른자를 이용해 그리는 템페라화가 주로 사용되었고 이는 르네상스 시기까지 이어졌다. 14세기 접어들어서는 비잔틴 양식의 장점을 흡수한 고딕 양식이 국제고딕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전 유럽의 표준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길드가 독점하고 있던 예술 시장에서 모든 공방의 장인들은 도제들에게 국제고딕만을 가르쳤다. 다른 예술 양식은 비집고 들어갈 틈조차 보이지 않던 시대였다. 그때, 피렌체에서 탄생한 르네상스 양식이 낡은 양식을 밀어내 버리고 전 유럽을 지배하는 양식이 되었다. 중세의 문이 닫히고 근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pp.43-44(중세까지의 미술)
     2) 대부분 르네상스가 15세기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그런데 서로 교류가 없었던 두 지역에서 동시에 생겨난 것이 특이하다. 그 하나는 피렌체에서 생겨난 이탈리아 르네상스요, 다른 하나는 브루게와 겐트 등 플랑드르로 불리던 지역에서 생겨난 북유럽 르네상스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인문주의 전통을 바탕으로 고대 신화와 오래전 역사 이야기를 그림에 가져왔고, 기술적으로는 원근법과 해부학 지식을 토대로 ‘환영주의’를 발전시켰다. 반면 북유럽 르네상스는 기독교 전통을 유지하면서 유화 기술을 바탕으로 섬세하고 세밀하게 그리는 그림을 발전시켰다.
     이들 지역에서 르네상스가 생겨난 이유는 우선, 피렌체나 플랑드르 모두 부유한 상인들의 도시였다는 것이다. 또한 교회의 간섭이나 강력한 정치권력에서 조금은 비껴나 있다 보니 비교적 자유로운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부를 바탕으로 신분 상승을 노리던 상인들은 위엄을 드러내기 위해 초상화를 그렸고 큰돈을 쾌척하여 교회에 제단화를 바쳤으며 가족 예배당을 경쟁적으로 꾸몄다. 화가나 조각가들이 이들 지역으로 몰리면서 그들간의 경쟁도 치열해졌고 이는 일련의 기술적인 혁신으로 나타났다.
     서로 각자의 길을 가던 양 진영은 15세기 말에 서로의 장점을 받아들이면서 한 단계 도약을 이루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이탈리아 르네상스가 우세하였다. 인문주의 전통을 적극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메치디 가문이 설립하고 지원한 플라톤 아카데미처럼 르네상스 운동의 이른바 싱크탱크가 잘 작동하고 있었고 예술가들도 인문주의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교양인임을 자처했다. 따라서 북유럽 화가들이 이탈리아 그림을 모방하는데 급급했다. 이러한 바탕에서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등장하게 된다. pp.80-81(르네상스 전반기)
     3) 절정으로 치닫던 피렌체 르네상스는 후원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1492년 사망하고 프랑스의 침공을 받으면서 막을 내렸다. 프랑스를 등에 업고 권력을 장악한 수도사 사보나롤라는 교황과 대립하면서 철저한 금욕의 삶을 요구했는데 그러다보니 르네상스 시기에 만들어진 예술품과 장신구들이 불태워지기도 했다.
     부유한 교황과 바티칸에 포진한 야심만만한 추기경들이 새로운 후원자로 등장하면서 르네상스의 주 무대는 곧 로마로 옮겨졌다. 폐허였던 로마가 화려하게 재건되기 시작했고 가톨릭교회를 대표하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이 착공되었다.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가 활약했던 이때가 르네상스의 최절정기였다. 그런데 당시 유럽의 지배자였던 카를 5세와 교황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갈등이 심화되었고, 결국 로마는 황제가 휘몰아 온 군대에 철저히 짓밟히고 만다. 1527년 이른바 로마 약탈이 자행된 것이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로마 르네상스 역시 짧은 영광을 뒤로하고 막을 내리게 되는데 그 바통을 이어받은 곳은 베네치아였다. 조르조네와 티치아노가 이룬 혁신으로 베네치아 예술은 르네상스의 피날레를 장식하게 된다. 같은 시기 피렌체와 로마에서는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화풍을 변형시킨 마니에리스모 그림이 인기를 끌게 된다. 다소 인위적이면서도 조각과 같은 관능적 아름다움을 추구한 마니에리스모 회화의 대표자는 브론치노였다. 두 지역 간 경쟁에서 승리한 쪽은 베네치아라고 할 수 있다. 화려한 색채와 더불어 사실적이며 생생하게 그려진 베네치아의 그림들은 이후 바로크 회화로 계승된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위세에 눌린 북유럽에서도 뛰어난 화가들이 있었다. 독일의 뒤러는 플랑드르와 이탈리아를 다니며 두 지역의 르네상스를 종합하는 성취를 이뤘고 역시 이탈리아에서 공부한 브뤼헐은 지역색과 민족성이 잘 드러난 개성 넘치는 그림을 선보였다. 르네상스의 마지막을 장식한 화가는 엘 그레코였다. pp.112-113(르네상스 후반기)
     4) 로마에서 생겨나 전 유럽으로 확산된 바로크는 르네상스만큼이나 위대한 예술가를 많이 배출했다. 베네치아의 틴토레토와 스페인의 엘 그레코에게서 그 가능성을 탐색했던 바로크는 안니발레 카라치와 카라조에 의해서 그 화려한 개화를 맞이한다. 카라치의 역동적인 화풍과 카라바조의 강렬한 명암법은 곧 종교 지도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게 되면서 교회 제단화의 기준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회화에서는 귀도 레니 등이, 조각에서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 등이 활약하면서 로마 바로크의 계보를 이었다.
     이탈리아 미술의 정수를 흡수해 바로크 전반기 최고의 자리에 오른 화가는 플랑드르의 거장 루벤스였다. 루벤스는 화려한 색채와 꿈틀거리는 필치로 초상화와 역사화를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 야콥 요르단스, 안토니 반 다이크 등이 루벤스를 계승해 플랑드르 회화를 이끌었으나 이후 북유럽 회화의 중심은 네덜란드로 옮겨가게 되었다. 프란스 할스, 렘브란트, 페르메이르, 얀 스테인 등이 활약했던 네덜란드에서는 종교화보다는 소박한 일상생활을 그린 장르화, 정물화, 풍경화 등이 인기를 끌었다. 주문을 받고 비로소 그림을 그리는 방식이 아닌 화가가 먼저 팔릴만한 그림을 그린 뒤 사람들에게 파는 방식이 처음 자리한 곳도 네덜란드였다.
     스페인은 카라치보다는 카라바조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특히 세비야 화파가 뛰어난 화가들을 많이 배출했는데 이들 중 디에고 벨라스케스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등이 이름을 알렸다.
     바로크 전개에서 가장 독특한 나라는 프랑스였다. 프랑스 회화를 대표하는 화가는 고전주의를 지향한 푸생이었다. 주로 로마에 머물며 작품 활동을 했던 푸생은 장엄 양식(그랜드 매너)을 창시해 이후 프랑스에서 시작된 아카데미 회화의 롤모델로 자리잡게 된다. 풍경화에서 푸생의 장엄 양식을 발전시킨 화가는 클로드 로랭이었다.
     바로크는 르네상스에 비해 다양한 장르에서 다양한 형식의 그림이 발전한 시기였다. 그림의 기법적인 측면에서는 르네상스 시대에 이뤄진 위대한 혁신을 모두 수용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룬 반면 표현의 측면에서는 르네상스가 지향한 조와화 비례, 균형의 원리를 뛰어넘어 역동적이며 감성에 호소하는 그림이 대세를 이뤘다. pp.148-149(바로크 시대)
     5) 18세기는 아카데미 미술의 전성기였다. 프랑스에서 시작된 아카데미 시스템은 유럽 각국에 복제되었다. 이를 통해 기술적 측면에서 고전미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거둔다. 18세기 전반은 로코코가 유행했고 이후 후반에는 신고전주의가 대세를 이뤘다.
    찬란했던 바로크 영광도 루이 14세의 죽음 즈음 막을 내린다. 자신을 제외한 타인에게는 사치와 화려함을 허락하지 않았던 그의 죽음 뒤, 사람들은 경쟁적으로 치장했고 향락 문화와 자유분방한 연애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다. 이 시대를 포착하고 그림에 담아낸 화가는 장 앙투안 와토였다. 그는 바로크를 계승하되 장엄하고 생동감 넘치는 남성적 요소를 제거하고 섬세하고 화려한 여성적 요소가 강조된 새로운 미술을 탄생시켰다. 이것이 바로 로코코 회화였다. 로코코 미술은 이후 프랑수아 부셰와 프라고나르에게 계승되었고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으로 퍼져나갔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서는 티에폴로와 카날레토가 활약했다.
     18세기 중반에 접어들어 로코코에 싫증 날 무렵, 고대 로마의 도시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폼페이가 발굴된 것이다. 르네상스 이래로 이어지던 고대에 대한 열망이 재점화되었다. 지식인들 사이에 이른바 그랜드 투어가 대유행을 하면서 로마는 다시금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굳건히 했다. 이때 강력히 대두된 미술이 신고전주의였다. 고대 신화를 비롯한 곡전이 다시 그림의 주제로 강조되었고 그림 속 인물들은 모두 고대의 풍경 속에 고대인들의 의상을 입고 등장하게 되었다. 독일 출신의 멩스가 로마 화단의 대표가 되었고, 프랑스의 다비드도 로마 유학을 통해 유럽을 대표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레이놀즈와 게인즈버러가, 스페인에서는 고야가 자신만의 개성 넘치는 그림을 그렸다. pp.186-187(로코코와 신고전주의)
     6) 혁명의 광기와 공포를 경험한 뒤 합리적 이성에 대한 신용을 버렸고 고대로부터 내려오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도 거부감을 느끼게 되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는 이제 진부하게 느껴졌다. 각 나라별로 자신들의 전설을 노래하고 먼 이국의 풍광에서 위안을 얻으려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예술가들은 자기 내면의 감정에 충실하려 했다. 이것이 낭만주의다. 독일의 프리드리히와 영국의 윌리엄 터너, 존 컨스터블 등이 그 시작에 있고, 프랑스에서는 테오도르 제리코와 들라크루아가 있다.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는 광기 어린 표현력으로 독특한 그림을 그려내 이후 상징주의를 예고했다.
     낭만주의의 시대가 지나고 사실주의 운동이 펼쳐진다. 사실주의는 신고전주의의 고답적이고 인위적인 면은 물론 낭만주의의 주관적이고 격정적인 면 모두를 거부한다. 그저 눈에 보이는 대로의 자연과 사람들을 그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두 경향으로 나뉜다. 카미유 코로, 프랑수아 밀레 등 퐁텐블로 숲 바르비종에 정착한 일군의 화가들은 깊이 있는 자연 풍경을 그리며 자연주의를 추구했고, 귀스타브 쿠르베, 오노레 도미에 등은 노동자를 비롯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리얼리즘 회화를 추구했다.
     전통적인 아카데미 회화의 위세는 여전했다. 앵그르를 필두로 하여 엘리트 미술교육과 살롱전을 지배한 아카데미 계열의 화가들은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도전에 맞서 오랜 전쟁을 치렀고 결국은 이들을 아카데미의 틀로 포용하여 아카데미의 권위와 기득권을 지키려 애썼다. 앵그르의 후계자인 알렉상드르 카바넬, 장 레옹 제롬, 윌리앙 아폴로 부그로 등이 그 주역들이다. 하지만 시간은 거침없이 흘러 새로운 미술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pp.218-219(낭만주의와 사실주의)
     7) 19세기 후반의 미술이 보여주는 주요 경향은 아카데미 미술에 대한 반발로 생겨난 낭만주의와 사실주의의 연장선에서 생각할 수 있다. 프랑스에서 생겨난 인상주의와 영국에서 생겨난 라파엘전파가 그중 대표적인 흐름인데 이들 모두 아카데미 회화의 경직성과 진부함을 극복하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인상주의는 몽마르트 지역에서 모임을 갖던 일군의 젊은 화가들에 의해 탄생한 미술이다. 이들은 살롱전이 보수화되면서 자신들의 그림을 알릴 길이 없어지자 자체적으로 전시회를 열었다. 이러한 무모하고 도발적인 시도는 당장 큰 성공을 거두지 못했지만 발 빠른 화상들과 수집가들의 이해관계와 맞아떨어지면서 이후 서양미술의 흐름을 완전히 바꾸는 혁명적 운동이 된다. 인상주의에 참여한 화가들이 연 인원으로 수십 명에 달하고 각기 지향하는 바로 너무나 달라 간단히 정의할 수 없지만 공통적으로 표방한 가치를 정리해보면, 외광 회화와 현대성이라는 큰 키워드로 수렴된다. 파리에서 생겨난 인상주의는 전 세계로 퍼져나간다. 독일의 막스 리버만과 로비스 코린트가 뛰어난 작품들을 보였고, 스페인의 호아킨 소로야, 미국의 차일드 하삼 등이 인상주의의 대표자로 손꼽힌다.
     인상주의보다 조금 앞서 영국에서는 라파엘전파 화가들이 인기를 얻었다. 이들은 아카데미 미술을 극복하기 위해 아카데미 미술이 모델로 삼은 라파엘로 이전의 그림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자연에서 배우는 예술을 표방하고 내면적 감성과 중세적 신비감, 초기 르네상스풍의 볼륨감을 강조하는 그림을 그렸다. 윌리엄 홀먼 헌트, 존 에버렛 밀레이, 단체 가브리엔 로세티 등이 대표자이며 후기에는 번 존스가 활약했다.
     인상주의가 마지막 전시회를 열고 해체될 무렵 인상주의와 교류하면서도 그 한계를 극복하려는 젊은 화가들이 등장했다. 세잔은 그 선구자로 홀로 고향에서 자신만의 그림을 추구했고, 그에 영향을 받은 고갱과 반 고흐는 색채를 통해 뚜렷한 성취를 이뤘다. 이들 외에도 쇠라, 시냐크, 로트레크 등 새로운 경향의 화가들이 등장하면서 이제 서양미술은 완연히 현대미술로의 진입을 본격화하게 된다. pp.248-249(인상주의, 후기 인상주의)
     8) 20세기 전반의 예술을 통칭해서 모더니즘 시대라 한다. 모더니즘의 기원은 인상주의로 거슬러 올라간다. 아카데미 회화의 극복을 주장한 인상주의는 다시 후기 인상주의로 이어진다. 20세기 벽두부터 모데, 르누아르, 세잔, 고갱, 반 고흐의 전시회가 잇따라 열리며 큰 성공을 거두자 이를 지켜보던 화가들은 좀 더 과감하게 모더니즘의 시대를 열어갔다. 독일에서는 에른스트 키르히너와 바실리 칸딘스키가 표현주의를 선보였고 파리에서는 앙리 마티스와 파블로 피카소가 야수파와 입체파를 선보이며 경쟁을 벌였다. 브라크와 함께 입체파를 창시한 피카소는 대범함과 카리스마로 미술계를 사로잡았고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뭉크와 클림트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독자적인 그림을 남겼고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도 빈을 대표하는 화가가 되었다. 청기사파를 이끌던 칸딘스키가 추상미술을 시도할 즈음 유럽 각지에서 추상미술이 대유행을 하게 되었다. 프랑스의 로베르 들로네, 러시아의 카지미르 발레비치, 네덜란드의 피에트 몬드리안이 그 대표 주자였다.
    세계대전은 오랜 번영에 대한 유럽 사람들의 낙관주의를 허물었다. 인간이 저지르는 참혹한 일들에 절망한 예술가들은 기존의 모든 권위와 상식을 조롱하는 다다이즘에 빠졌다. 마르셀 뒤샹과 같은 천재가 있었지만 부정과 파괴에 골몰한 다다이즘이 예술적 결과물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웠다. 이들은 곧 프로이트의 무의식 세계를 탐색하면서 초현실주의로 넘어가게 되는데, 르네 마그리트, 막스 에른스트, 살바도르 달리, 호안 미로 등이 큰 성과를 거두었다. 같은 시기 이탈리아에서 온 모딜리아니와 러시아 출신의 마르크 샤갈이 개성 넘치는 그림을 남겼다. 나치가 자신들의 기준에 맞지않는 화가들을 탄압하고 2차 세계대전이 전 유럽으로 확산되자 예술가들은 뉴욕으로 몰려들었다. 그 결과 파리는 예술의 중심으로서의 지위를 뉴욕에 넘겨주게 되었다. pp.284-285(20세기 전반의 미술)
     9) 종전 후 패권국에 돌라선 미국은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패권국이 되려고 했다. 본래 추상을 육성할 생각은 없었으나 소련이 획일적인 전체주의적 예술을 독려하자 이에 맞서기 위해 보다 자유로운 느낌의 추상미술을 지원하게 되었다. 액션 페인팅을 선보인 잭슨 폴록이 나타나고, 1950년대에는 색면추상화가들이 화단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마크 로스코, 바넷 뉴먼, 클리포드 스틸 등이 그 대표자다. 이들의 그림은 단순했지만 그 단순함 속에 담아낸 철학은 만만치 않았다. 이런 색면추상 그림들은 미술 애호가들에게는 지지를 받은 반면 대중들에게는 거부감을 주었다. 이는 색면추상 회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20세기 전반을 지배했던 모더니즘 미술의 전반적인 문제점이었다. 입체파에서부터 추상, 초현실주의를 거쳐 추상표현주의에 이르기까지 미술은 과거에 쉽게 감상할 수 있었던 아름다운 미술에서부터 멀어지고 있었다.
    대중문화가 발전하면서 팝 가수와 영화배우들이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등장한 것이 팝아트였다. 유명인들의 실크스크린 판화로 인기를 모은 앤디 워홀을 필두로 팝아트는 무척 도발적이지만 매우 쉬웠다. 대중들은 로이 리히텐슈타인, 톰 웨설먼, 클래스 올덴버그 등이 선보인 팝아트를 즐겼다. 추상표현주의에 이어 팝아트까지 전 세계적 유행을 만들어내면서 뉴욕은 예술의 중심지로 발돋움했다. 팝아트의 뒤를 이어 도널드 저드, 프랭크 스텔라 등에 의해 기존의 모든 예술 개념을 거부한 미니멀리즘이 등장하고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가 미술의 새로운 길을 열었다.
     유럽에서도 예술의 명맥은 계속 유지되었다. 프랑스의 이브 클랭은 파격적이고 전위적인 예술을 선부였고 스페인의 안토니 타피에스는 구상-형체를 해체한 앵포르멜 미술을 대표했다. 이탈리아의 루초 폰타나는 공간의 개념을 탐색해 미니멀리즘과 현대미술에 큰 족적을 남겼고 데이비드 호크니는 영국식 팝아트로 인기를 얻었다. 독일을 대표하는 게르하르트 리히터는 사진과 회화, 구상과 추상, 채색과 단색을 넘나드는 독특한 실험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렇듯 20세기 후반은 모더니즘이 막을 내리고 그 자리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대체하는 시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 재현을 목표로 하는 리얼리즘을 거부하지만 동시에 모더니즘의 엘리트 취향도 거부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대중 예술에 기반해 상업성과 예술성이 혼재하는 경향을 띤다. 또한 기존 권위를 부정하고 다양성을 존중하는 경향도 보인다. pp.316-317(20세기 후반의 미술)
    10) 21세기를 맞은 지금 세계 미술의 경향은 크게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다. 그 하나는 미술의 분야 간 경계가 이제 완전히 무너지고 있다는 것이다. 화가냐 조각가냐의 구분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가장 인기 있는 예술가를 손꼽히는 제프 쿤스와 데미언 허스트, 아니쉬 카푸어 그리고 올라퍼 엘리아슨 등의 작품들은 회화나 조각이라 부르기 어려운 조형물의 범위에 속한다. 사진의 약진도 눈에 띈다. 20세기는 상업사진과 보도사진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는데 신디 셔먼, 안드레아스 구르스키 등의 사진들이 작품성을 인정받으면서 사진 미술관이 늘어나는 등 순수예술로서 사진의 위상이 달라졌다.
     두 번째 경향은 세계화다. 유럽과 미국 일변도의 세계 미술 판도에 최근에는 다양한 지역에서 뛰어난 예술가들이 등장하면서 세계화가 이뤄졌다. 야요이 쿠사마, 무라카미 다카시 등 일본 예술가들이 명성을 얻었고 최근에는 아이 웨이웨이를 대표로 하는 중국 예술가들의 성장이 두드러진다. 중국 미술 시장은 이제 미국 시장을 제치고 세계 최대 시장으로 떠올랐다. 중국 수집가들이 미술 시장의 큰손으로 자리하면서 미술품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뛰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최근 세계 미술 시장에서 1970년대부터 오직 한길을 걸어온 한국의 단색화가들이 주목받고 있다. p.344(우리 시대의 미술)
     
    2. 마사초(1401~1428). 서양미술 최초로 원근법을 구사한 천재 화가. 르네상스 회화의 선구자.
    <성 삼위일체>(1427) : 마치 벽면을 파낸 듯 공간감을 만들어내고 있다. 또한 정밀한 계획하에 여러 단계로 구성한 것이 특징이다. 맨 바깥부터 좌우 무릎을 꿇은 이들은 이 그림의 기증자다. 한 단 위로 성모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서 있고 그 뒤에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있으며 예수의 뒤 높다란 단 위에 신이 서 있다. 즉 화가는 평면에 4단계 이상의 거리 차이를 만들어 낸 것이다. pp.24-25
     
    3. 단축법 : 낮은 시점에서 대상을 경사진 각도로 관찰하면서 납작하게 그리는 기법. 만테냐 <결혼의 방>. pp.36-37
     
    4. 환영주의 : 15세기 피렌체에서 탄생한 이래 이후 수백 년에 걸쳐 화가들은 원근법을 마스터하고 보완해 나갔다. 이러한 노력들을 환영주의라고 부른다. 말 그대로 거짓의 환영을 만들려는 환영주의의 궁극의 목표는 그야말로 그림 보는 이들을 완벽하게 속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p.39
     
    5. 카스파르 다비드 프리드리히 <연무 위의 방랑자> : 화가의 대표작인 이 그림은 장엄한 풍경을 마주한 고독한 인간상을 통해 숭고함을 느끼게 하는 낭만주의의 걸작이다. p.42
     
    6. 다 빈치의 자연스러운 그림과 미켈란젤로의 조각 같은 그림은 라파엘로에게서 만난다. 두 거장의 장점을 모두 갖췄다고 평가받는 라파엘로는, 미켈란젤로의 계승자에 가깝다. 라파엘로는 중세의 장인과 구분되는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의 개념을 확립했다. 미켈란젤로가 그랬듯 예술가라 불리려면 손기술만 가진 것이 아니라 고전에 대한 체계적이고 깊은 지식을 포함해 방대한 교양을 갖춰야 한다고 믿었던 것이다. 라파엘로는 해부학 지식을 바탕으로 한 소묘를 중시하는 그림, 조각과 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그림을 완성했다. 하지만 동시에 자연스러운 분위기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다 빈치로부터 배운 부드러움을 자신의 그림에 가미했다. pp.65-66
     
    7. 멩스, <뒤에서 본 앉아 있는 남성 누드> : 멩스의 정교한 소묘 능력을 보여주는 이 그림은 잘 만든 조각을 연상시킨다. 미켈란젤로가 강조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잘 구현되어 있다. p.70
     
    8.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넘어서는 지나친 관능성으로 논란이 되기도 한 이 그림은 나폴레옹 3세가 관람 즉시 구매한 것으로 유명하다. 공중을 날고 있는 아기 천사(푸토)들이 신화를 그린 그림이라는 증거가 된다. p.72
     
    9. 얀 반 에이크 : 북유럽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유화의 선구자. <아르놀피니의 결혼>. 고전회화에서 부부의 그림에 그려진 강아지는 정절을 상징한다. pp.87-89
     
    10. 카라바조(1573-1610) : 바로크 시대를 연 천재 화가. 명암법을 특징으로 하는 사실적 그림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으나 무절제한 삶으로 인해 불행한 최후를 맞이한다. <골리앗을 죽인 다윗>. 이 그림에 대한 해석은 극단적으로 갈린다. 골리앗을 측은함과 원망으로 바라보는 다윗의 얼굴은 그의 소년기 얼굴이며, 골리앗의 얼굴은 당시의 화가 얼굴로서 지난 과오를 진심으로 반성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지만 오직 사면을 받기 위한 술수로 그려진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사울의 개종>. 분위기가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연극 무대 같다고 하여 카라바조의 작품의 ‘연극적 사실주의’라 불린다. pp.119-120
     
    11. 빛과 어둠의 대비를 강하게 사용한 카라바조의 명암법은 원어로 키아로스쿠로라고 한다. 키아로는 빛을, 스쿠로는 어둠을 뜻한다. p.128
     
    12. 고전회화를 완성시킨 네 가지. 원근법, 해부학, 유화, 명암법. 앞의 세 가지가 르네상스 시대를 있게 했다면, 명암법은 그 뒤를 이은 바로크 시대를 있게 했다.
    르네상스 시대에 예술가들은 캔버스 뒤로 공간을 만들어 냈다. 원근법을 이용해서였다. 그리고 해부학과 유화를 이용해 그 공간 속 인간과 사물을 보다 완벽하고 생생하게 그려냈다. 이로써 눈을 속이는 착시의 마법인 ‘환영주의’는 완성된 것처럼 보였고 화가들은 충만한 자신감으로 하나의 화면 안에 보다 많은 것을 그려 넣으려 했다. 명암법은 이러한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그림은 이제 ‘보이는 모두를 과시하듯 나열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만 선택해 강조함으로써 ‘화가가 의도한 바를 호소력 있게 전달하는 수단’이 된다. 단순화시켜 말한다면 이들 두 시대엔 관심의 방향이 달랐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이 주로 대상만 바라봤다면 바로크 예술가들은 관람객들의 마음을 노렸다. pp.138-139
     
    13. 반 고흐는 렘브란트를 아주 좋아했다. 렘브란트는 카라바조가 만들어낸 명암법을 완성시켰다. pp.143
     
    14. 알라 프리마(alla prima) : 단번에 그리다. 먼저 칠한 물감이 마르기 전에 그 위에 물감을 칠해가며 완성하므로 빠른 속도로 그려져야 한다. 벨라스케스, 모네 등. p.177
     
    15. 모네의 <수련>을 보면 알라 프리마만으로 끝낼 수 없는 부분도 보인다. 특히 수련의 잎들과 꽃들이 그렇다. 모네는 이들을 그릴 때 특유의 과감한 임파스토 기법을 구사했다. 임파스토란 물감을 매우 두텁게 발라 실제 사물처럼 도드라진 효과를 내는 것이다. 이들은 일정 시간 말린 뒤 마무리를 할 수밖에 없다. 얼마나 두텁게 그려졌는지 물위에 떠 있는 수련의 잎들과 꽃들이 마치 부조처럼 느껴진다. p.175
     
    16. 알라 프리마가 인상주의의 외광 회화를 가능하게 한 이면에는 기술과 산업의 발전이 큰 영향을 끼쳤다. 튜브형 물감이 나오고, 철도가 대중화 되었다. 이들은 인상주의 풍경화를 낳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여기에 일라 프리마가 기법적으로 더해진 것이다. 이들 덕분에 인상주의의 혁명이 가능했다. pp.177-178
     
    17. 도미니크 앵그르 : 다비드의 후계자로 프랑스 화단에서 신고전주의를 대표한 화가. 장엄 양식을 추구했으며 정밀하고 섬세한 초상화와 동양풍의 그림에 뛰어났다.
     
    18. 외젠 들라크루아 : 프랑스 낭만주의의 거장. 지식과 철학을 내세우는 소묘 중심의 아카데미 화풍을 거부하고 상상력을 중시한 문학적인 그림을 그렸으며 새로운 색채 이론을 그림으로 구현하였다.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그는 그림의 주제가 자극적이고 격렬한 만큼 이를 표현하는 방법도 강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를 위해 색채에 집중했고, 채색의 기술과 접근 방식을 새롭게 만들어냈다. 그는 앵그르로 대표되는 고전미술에서 검정색을 포함한 회색을 경멸했다. 그림에서 생기를 빼앗는 진부한 색이라 여겼다. 노랑과 파랑, 초록과 빨강처럼 보색 관계의 색들은 섞으면 회색이 된다. 그는 보색에 대한 완벽한 이해로, 회색이 필요한 그림자를 표현할 때도 회색이 아닌, 초록과 빨강을 썼다. 이렇게 하면 회색 하나만을 칠한 것보다 훨씬 강한 생동감과 시각적 자극을 줄 수 있다. 들라크루아는 팔레트 위에서 물감을 섞는 것이 아니라 다른 색들을 중첩시켜가며 본래의 색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그림을 그린 최초의 화가라 할 수 있다. 이런 방식은 부드럽고 선명한 그림을 추구한 아카데미 미술에서는 금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이를 소묘로는 강렬함과 생명력을 표현할 수 없다고 보고 그 답을 색채에서 찾았다. “나는 차분히 생각하게 하는 그림을 좋아하지 않는다. 격렬한 내 마음은 언제나 짜릿한 흥분을, 그리고 구속받지 않는 자유로움을 원한다.” pp.194-197
     
    19. 고전미술이 시작된 이래 원색이 그대로 화폭에 그려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동안 서양미술은 선 중심의 회화와 색채 중심의 회화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치열한 대결 양상으로 전개된다. 생생함을 자랑하는 유화가 등장한 이후에도 대부분의 시기에 주류 미술은 선 중심의 회화였다. 르네상스 시대 미술의 최우선 과제가 ‘자연에 대한 관찰을 바탕으로 눈으로 보는 것과 똑같은 그림을 그려내기’다. 이를 위해 화가들은 원근법과 해부학을 연마해 완벽한 소묘를 그려내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그 연장선에서 채색도 원색에 가까운 강렬한 색보다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다.
     색채의 반격은 베네치아 회화로부터 시작된다. 티치아노로 대표되는 베네치아 회화가 그 이전과는 비할 수 없이 화려한 색감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러다 색채 중심의 회화가 완전히 우위에 섰던 시기는 바로크 시대였다. 티치아노의 그림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던 루벤스는 꿈틀거리는 색채들로 가득한 그림을 선보여 유럽 회화를 지배했다. 그러나 루이 14세 시대에 국가가 주도하는 아카데미 미술이 등장해 선 중심의 회화는 다시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고, 특히 18세기 중엽 폼페이가 발굴되면서 고돼 로마에 대한 열광이 재점화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탄생한 신고전주의는 선 중심 회화의 우위를 확고한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색채 중심의 회화는 과학적 성과를 토대로 재전개 된다. 빛은 빨강부터 보라에 이르기까지 여러 색으로 분할되며 이것이 곧 자연의 색임을 알려준 뉴턴, 20년간 색채를 연구하며 색채를 광학만이 아닌 색채가 불러일으키는 효과까지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 괴테가 그 주역이다. 괴테에 따르면 색채에 대해 세 자기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빛으로서의 색의 본질, 둘째는 우리의 눈이 색을 지각하는 방식, 셋째는 색이 우리 마음에 불러일으키는 효과다. 즉 색과 관련해 광학, 생리학 그리고 심리학 이 세가지 측면 모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괴테의 연구에 영향을 받아 19세기 전반 색채 이론은 전성기를 맞게 되었다. 들라크루아는 부차적 요소로 여겨졌던 색을 그림의 주제로 사용하면서 자유자재로 색을 구사할 수 있었다. 티치아노나 루벤스의 경우 자신만의 색채 효과를 유형화하여 그것을 반복해서 사용했지만 들라크루아는 작품의 주제와 성격에 따라 그때마다 알맞은 색채 효과를 사용했다. pp.198-201
     
    20. 인상주의 화가들의 우상으로 여겨지던 들라크루아의 영향으로, 인상주의 회화에서 회색은 금기의 색이었다. 특히 모네와 르누아르 등 외광 회화를 지향했던 인상주의 풍경화가들은 밝은 빛을 화폭에 구현하기 위해 색을 섞지 않고 보다 적극적으로 원색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p.204
     
    21. 색채 이론을 그림에 접목한 화가 중 가장 독특한 실험을 해나간 이는 쇠라다. 신인상주의자로서 점묘화를 창시했다. <라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에는 쇠라 특유의 유머와 풍자가 가득하다. 대표적으로는 매춘부를 의미하는 낚시 이미지와 원숭이 등장이다. pp.213-214
     
    22. 마네 <풀밭 위의 점심 식사>. 조르조네의 <전원의 합주>에서 인물 구성에 착상을 얻고, 라파엘로의 판화 <파리스의 심판>에서 인물들의 배치를 가져왔다. p.226
     
    23. 샤를 보들레르. 시인이자 미술 평론가. 시집 <악의 꽃>으로 프랑스 화단에 큰 충격을 던졌으며, 평론가로서 현대성이라는 개념을 제시해 인상주의의 태동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p.230
     
    24. 르누아르 <뱃놀이 일행의 오찬>. 이 유쾌한 그림에는 르누아르의 친구들이 등장한다. 왼편 아래 꽃장식 모자를 쓴 여인은 미래에 르누아르의 아내가 된 알린 샤리고이며, 오른쪽 아래 의자를 거꾸로 해서 앉은 이는 동료 화가 카유보트이고, 오른쪽 위로 자신의 양 볼에 손을 댄 여인은 당시 인기 배우 잔 사마리다. p.239
     
    25. 인상주의를 낳게 한 세 가지 혁신. 벨라스케스의 알라 프리마 기법, 들라크루아가 차용한 색채 이론, 보들레르가 주창한 현대성의 개념. 여기서 현대성(Modernity)이란, 일상에서 마주한 찰나적이고 우연적인 순간에서 시인과 같은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한 시적이며 영원한 아름다움을 말한다. p.240
     
    26. 귀스타브 카유보트 : 인상주의에 뒤늦게 합류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한 화가. 뱃놀이를 좋아했으며, 부유함을 이용해 어려운 동료들의 그림을 많이 사주었고 전시회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불하는 등 인상주의 명맥이 유지되는 데 큰 도둠을 주었다. p.244
     
    27. 나폴레옹은 프랑스만의 혁명을 전 유럽의 혁명으로 바꾼 인물이다. 그리고 근대의 완성자로 불린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법체계를 정비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가 공표한 나폴레옹 법전은 근대의 기둥이 된다. 이 법전은 중세의 잔재를 완전히 뿌리뽑게 했다. “혁명은 모든 특권의 폐지, 즉 영주의 재판권 폐지, 낡은 농노제의 폐지, 봉건적 의무의 폐지를 뜻하며, 동시에 국가가 전 시민, 전 재산에 대해 세금을 매기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유럽은 나폴레옹이 제시한 국민국가의 비전이 현실로 이뤄지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각 국가마다 국민국가로 이행되는 단계와 과정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중 러시아는 구시대의 잔재를 가장 많이 끌어안고 있던 나라였다. 차르라는 강력한 독재자 아래 국민들은 비참한 삶 속에서 복종을 강요당했고, 그에 반발해 불의와 부조리를 극복하려는 움직임도 커져갔다. 이 시대정신은, 푸시킨, 고골리, 네크라소프, 투르게네프,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체호프 등을 통해 문학에서 먼저 터져나왔다. 차르 비밀경찰들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도 농촌으로 가 계몽운동을 벌인 지식인들은, 농노의 삶을 숙명으로 여기는 시민들이 계몽되어야 나라가 바로 선다고 생각해서 ‘민중 속으로’라는 의미를 가진 브나르도 운동을 전개했다. pp.245-246
     
    28. 다 빈치는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해 원근법 공간이나 풍경을 보다 완벽하게 그리는 데 사용했다. <대사들>의 홀바인이나 <진주 귀고리 소녀>의 페르메이르 등도 카메라 옵스쿠라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p.265
     
    29. 카메라의 발전으로 화가들은 더 이상 ‘대상을 묘사하는 것’으로는 사진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문제를 인식한 세잔은, 대상을 화폭에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표현’하는 것으로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다. 세잔 <대수욕도>. 어린 시절의 추억을 테마로 목욕하는 사람들을 반복해 그린 세잔은, 화가의 머릿속에서 재구성한 형태와 색면들로 그림을 채웠다. p.268
     
    30. 표현(Expression) : 보이는 그대로를 그려낸다는 뜻의 재현(representation)에 대비되는 말로서 화폭에 화가의 생각, 구상, 감정과 같은 요소들을 구현하는 것. p.274
     
    31. “나의 유일한 스승 세잔은 우리 모두에게 있어 그야말로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다.” -피카소- p.279
     
    32. 음악적 감성과 화려한 색채가 도드라지는 킨딘스키의 그림을 ‘따뜻한 추상’이라 부르는 반면 감성이라고는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그야말로 한치의 오차도 없는 ‘수직의 공간’들로 이뤄진 몬드리안의 그림은 ‘차가운 추상’이라 불린다. p.305
     
    33. 마크 로스코 : 1950년대 세계 미술을 주도했던 색면추상 회화의 채표자로 색채를 통해 심오한 철학적 탐구를 했다. 단순한 구성을 택하지만 색면의 경계를 모호하게, 또한 물감도 번진 듯하게 그려낸 그의 그림은 관람객 내면의 감정선을 자극하는 힘이 있다. 고흐나 뭉크가 화가 내면의 감정을 쏟아낸 스타일이라면 로스코는 극도의 절제를 통해 오히려 관람자들의 감정이 터져 나오게 만든다. p.312
     
    34. 뒤샹에 의해 미술에 새로운 문이 열렸다. 예술가에게 중요한 건 무엇보다 ‘예술을 감지하는 예리한 촉’이 된다. 남들과 다른 시선으로 평범한 세상 속에 감춰진 보석을 길어내는 이른바 ‘착상(conception)’에 탁월해야 하며 예술가 자신이 직접 만들어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p.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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