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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말들> -이문영-비소설/국내 2023. 11. 15. 11:09
1. 죽는 것은 한 인생의 절멸인데, 살아남으니 죽음이 너무 흔했다. p.31
2. 동양시멘트는 향토 기업이었다. 삼척 출신이 세운 회사였고, 삼척 주민들이 일군 회사였다. 가족이 대를 이어 일했고, 학교 선후배가 직장 선후배로 만났다. 같은 동네에서도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갈렸고, 한 가족 안에서도 신분은 나뉘었다. 동일 노동자 중 15퍼센트는 최저 시급 미만의 급여를 받았다. 잔업•특근 등 연장 근로가 2백 시간을 넘는 경우도 흔했다. 향토 기업 안에 향토의 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p.64
3. 나천일의 큰아들(27세)은 대기업 조선소에 비정규직으로 취업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말을 듣지 않았다. “작은 회사라도 좋으니 정규직이 돼라”고 나천일은 아들에게 당부했었다. 열심히 일하면 정규직이 될 수 있다고 아들은 믿는 듯했다. 명절 때 쉬었다는 이유로 경위서를 쓰며 키운 아들이었다. 아들의 믿음은 동양시멘트 하청 노동자로 나천일이 22년간 매달린 믿음이기도 했다. 믿음을 포기하면 삶은 허망했고, 믿음을 포기하지 않으면 삶은 괴로웠다. 정년을 한 해 앞둘 때까지 유예되던 믿음이 해고로 조각났다. 아버지는 아들의 믿음을 깰 수도 북돋울 수도 없었다. 빨간 머리띠를 두르고 ‘해고 철회’를 외치던 아버지가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규직이 되고 싶으면 말이다...... 속상한 일이 있어도 꾹 참아야지...... 아버지처럼은 살지 말아야지....” p.67
4. 아저씨의 손가락이 지정한 방에 넣어가며 그는 너가 됐고 그들과 너들의 개별성은 실종했다. p.73
5. 처음엔 백화점에서 쇼핑하는 고급한 고객들이 너무 더러워 놀랐는데, 사람이란 게 본래 더러운 종자란 걸 그는 알게 됐다. p.78
6. 밝은 것이 모든 것을 밝히 보여 주는 것은 아니었다. 지나치게 밝으면 있는 것이 보이지 않을 때도 있었다. 생산직 여성 노동자들이 실밥을 밥처럼 먹으며 만든 옷을 판매직 여성 노동자들이 자신의 감정까지 덤으로 포장해 팔았다. 좁고 탁한 저임금 노동이 널찍하고 청정한 저임금 노동으로 가려졌다. p.95
7. 찬란은 빈곤을 묻어 감췄다.
고층의 빌딩이 첨단으로 깎아지르는 동안 가난한 삶도 수직으로 가팔라졌다. 거칠한 공단이 매끈한 얼굴로 바뀌어도 메마른 노동은 디지털로 진화하지 못했다. p.111
8. 빨리 와서 세탁기 고치라는 고객의 전화가 새벽 5시부터 걸려 왔습니다. 잠을 설치는 그는 24시간 편의점이었습니다. 그는 일중독자가 아니었습니다. 고정급 없는 분급 노동자 아빠로서 사랑하는 딸을 지키려는 발버둥이었습니다. 수리를 마칠 때마다 남편은 고객들에게 망설이며 부탁했을 것입니다. ‘해피콜이 오면 서비스에 만족한다고 답해 달라’며 우물쭈물했을 그의 모습이 너무 아픕니다. p.136
9. 손님이 뜸한 시간에 나는 폐기를 막고 폐기를 삼켰다. 신속한 폐기의 대체는 편의점 식품 유통의 대원칙이며, 폐기하고 대체하는 일은 편의점 알바의 주요 업무였다. 언제든 폐기되고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은 편의점 음식과 알바가 공유하는 운명이었다. 편의점에서 폐기를 찍고 폐기를 먹다가 폐기되는 일은 알바가 부양하는 세계를 작동하는 ‘편의의 원리’였다. p.168
10. 사랑 :「표준국어대사전」 ‘이성의 상대’에게 끌려 열렬히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 마음의 상태 → ‘어떤 상대’의 매력에 끌려 열렬히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2012년 12월 개정) → ‘남녀 간’에 그리워하거나 좋아하는 마음, 또는 그런 일(2014년 1월 재개정).
웅(...) 신동진(게이)는 분노했다. 사랑의 뜻 재개정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살의”를 느꼈다. 자신의 사랑을 죽여 없앤 언어의 살기가 무서우면서도 용서할 수 없었다. 인구수와 동일한 사랑의 색깔에 국가가 단색의 사랑을 덧칠했다. p.309
11. 한韓국어로 가득 찬 한韓국에서 한恨국인들은 말할 언어가 없고, 한恨국어가 팽배한 한韓국에서 한恨국인들은 살아 낼 수가 없다.
한韓국과 한恨국은 같은 나라인가.
한韓국어가 국어인 시민과 한恨국어가 실제인 시민은 같은가. 두 언어가 서술하는 삶은 같은 삶인가. 두 나라를 나누는 장벽, 부유와 가난을 나누는 장벽, 정상과 비정상을 나누는 장벽, 정규와 비정규를 나누는 장벽, 일단이 이단을 갈라 치고, 일반이 이반을 찢어 내며, 다수가 소수를 억누르고, 파랑이 빨강을 정죄하며, 역사가 비역사를 떨어내는 언어의 장벽이 한韓과 한恨 사이에 있다. p.477
12. 애써 말해야 하는 삶들이 있다. 말해질 필요를 판단하는 것이 권력이고, 말해질 기회를 차지하는 것이 권력이다. 말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권력과 거리가 먼 존재일수록 말해지지 않는다. 말해지지 않는 것들이 말해지도록 길을 내는 언어가 절박하다. 의미가 파괴된 ‘말의 잔해’로는 한韓국과 한恨국 사이의 장벽을 드러낼 수 없다. p.478'비소설 > 국내'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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