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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가난하고 쓸데없이 바빴지만> -글 서영인, 그림 보담-비소설/국내 2023. 11. 21. 10:17
1. 존재보다 존재감이 중요하다. p.78
2. 신체의 노화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노화에 따른 장애나 결핍을 노화를 핑계로 방기하는 것은 문제다. 한 끗 차이로 꼰대가 된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이 알고 있는 단어의 범위 내에서 내 말이 어떻게 받아들여져야 하는지에 대한 고려 없이, 비판이나 풍자, 혹은 거부의 목적의식도 없으면서 부정확한 말을 흘려 놓고도 그걸 나이 탓(혹은 나이 덕?)으로 돌린다면, 또는 부정확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하는 말이 그간 말을 쓰며 살아온 내 경력으로 말미암아 상쇄되거나 은폐될 거라고 나도 모르게 자신하고 있었다면, 그건 끔찍한 일이다. pp.86-87
3. 나는 오래된 설비 가게와 낡은 세탁소와 비건 빵집이 함께 있는 망원동의 풍경이 좋다. 작은 리어카와 진열대 위에 도무지 누가 사 갈지 모르겠는 견과류와 반찬들과 중고물품을 늘어놓은 좌판이 쫓겨나지 않고 자기 장사를 하는 망원동을 좋아한다. 동네 아줌마들이 함께 모여 고구마 줄기와 도라지를 다듬는 걸 쭈그리고 앉아 구경하다가, 이건 데치고 이건 무치고 하는 설명을 듣고 슬그머니 검은 비닐 봉지에 갓 다듬은 채소를 사 들고 돌아오는 산책길이 좋다. 뒤죽박죽에 질서 없이 그러나 무조건 열심인 대책 없는 이 동네가 마음에 든다. p.152
4. 가게는 좁고, 음식은 맛있고, 주문을 받으면 조리가 시작되니 대기시간이 길 수 밖에 없다. 문밖에서 대기하는 고객들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 안에 있는 손님이 불안해진다. 얼른 먹고 나가야 하는 것이 아닌지, 안절부절하며 밥을 먹다 보면 맛을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불친절하다 싶을 정도로 대기 고객들에게 무관심한 것은 안에 있는 손님들이 최대한 맛있게 밥을 먹을 수 있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이 집의 친절과 불친절은 최대한 맛있는 식사를 대접하려는 원칙 위에서 만들어진 질서이자 리듬 같은 것이었다. 지루하고 불편한 기다림과 맛있고 고요하고 느긋한 식사 사이의 칸막이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p.162
5. 음식은 입으로만 먹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도 먹는 것이다. 김치도 젓갈도 오징어채무침이나 깻잎절임 같은 반찬도 모두 벌겋기만 해서 까끌한 입맛에 영 식욕이 돌지 않는다. 재료값을 생각하고 회전율을 생각하며 어쩔 수 없이 가성비 좋고 손 덜 가는 반찬류를 내놓는다 해도, 무언가 아쉽고 허전해서 통깨라도 넉넉히 뿌려 놓는 마음 씀씀이가 있다면 그 집 반찬은 틀림없이 먹을만하다. 콩나물에 당근채라도 살짝 섞어 놓고, 마른반찬류에 청양고추나 붉은 고추라도 뿌려 놓는다면 그건 식사를 만드는 사람이 밥 먹는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다는 증거다. p.171
6. 다정함과 무심함 사이, 모르는 척 지나칠 때마다 잠시 뒤통수를 긁적이는, 이 골목에서 우리는 딱 그만큼의 공동체로 산다. 나름대로 자기만의 생활과 비밀을 가지고,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훨씬 재미있을 거라고 호의적으로 상상하고 내색하지는 않으면서. pp.243-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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