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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인사> -김영하-소설/국내 2023. 12. 27. 14:59
1.『천자문』의 우주는 엄밀히 말하자면 우리가 지금 말하는 그 우주가 아니란다. 집 우(宇)는 집의 대들보에서 비롯된 글자로 공간을 뜻하고, 집 주(宙)는 밭(田)에 싹이 움트는 모양에서 온 것으로 즉, 시간의 변화를 의미하지. 그러니까 이 문장은 공간과 시간이 넘치도록 크고 황량하다는 뜻으로 읽어야 돼. 그런데 이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의 특성이기도 하지. 우주의 대부분은 그냥 텅 비어있단다.“ p.19 2. 그곳을 떠나 많은 것을 보았고,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존재하는 것이 온당한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긴 시간을 보냈다. 여기서 구조되더라도 육신이 없는 텅 빈 의식으로 살아가다가 오래지 않아 기계지능의 일부로 통합될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를 더 이상 묻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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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하고 밀당 중입니다> -지모-비소설/국내 2023. 12. 27. 14:50
1. 얼마나 힘들었을지 일단 아이의 마음에 공감을 해주었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 모든 사람이 나와 다 맞을 수는 없는 거라고, 선생님도 그 수많은 사람들 중 너와 맞지 않는 사람일 뿐이지 두려운 존재가 아니니 선생님 말씀을 존중하고 존경하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선생님의 말씀이나 행동 하나하나에 크게 의미 두지 말고 걱정하지 말라고, 다른 건 몰라도 그 수많은 사람 중 엄마는 무조건 너의 편이니 언제나 마음속 깊이 든든하게 생각하고 안심하라며 담담한 척 말해줬지만, 그날 난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p.54 2. 눈 앞에 잔뜩 꼬여 있는 털실을 풀고 풀고, 풀리면 또 꼬여 있는 부분이 생겨 또 풀고 풀고 푸는 걸 무한 반복한다. 잔뜩 꼬여 있는 문제들이 아이 앞에 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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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하는 마음> -은유-비소설/국내 2023. 12. 27. 14:46
1. 글의 총합이 책이 아니라는 것. 좋은 글이 많다고 좋은 책은 아니라는 것. 한 권의 책은 유기적인 구조를 갖고 있으며 책을 관통하는 하나의 메시지와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는 것, 그 일을 과단성 있게 솜씨 좋게 해내는 사람이 편집자라는 것. 저자는 외부자의 시선을 갖기 어렵기에 편집자의 말에 귀 기울여야 한다는 것. 좋은 출판사보다 좋은 편집자를 만나는 게 중요하다는 것. pp.12-13 2. 그보다 우선시되는 덕목은 만나는 사람마다 최선을 다해 예의를 갖추고, 다음에 언제든 다시 만날 거란 생각을 하면서 그 예의에 진심을 보태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길 줄 아는 절로 구부러짐, 그 태도에서 나에 대한 사람들의 믿음은 절로 생겨날 것입니다. p.57 3. 동료와 다투더라도 서로 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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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쥐> -요 네스뵈-소설/국외 2023. 12. 27. 14:44
1. “(...) 당신이 보는 그림은 당신이 있는 위치와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잖아요.” (...) “그럼에도 어디서 보느냐 하는 문제가 남아요. 요지는, 다 상대적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엄청나게 복잡해지기도 하고.” p.147 2. “그럼 어떤 사람을 진실로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요?” “글쎄요, 거대하고 어두운 숲으로 난 길을 찾기까지 꼭 긴 시간이 걸리는 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의 마음속에는 잘 닦인 길이 곧게 뚫려 있고 가로등과 표지판도 있어요. 그런 사람은 속속들이 다 말해줄 것처럼 보여요. 하지만 무슨 일이든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돼요. 환한 길에 산짐승이 보이지 않으면 덤북에서 나타나니까요.” p.227 3. “우리가 함께였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 같기는 해, 그렇지만 크리스틴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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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 -김훈-소설/국내 2023. 12. 27. 13:57
1. 15년여 전의 글이 낯설어 보이니, 마음이 세월과 더불어 늙었음을 알겠다. 마음이 늙으면 나 자신과 세상이 흐리멍덩하고 뿌였다. 개념의 구획이 무너진 자리에 작은 자유의 공간이 생겨나는데, 늘 보던 것들이 처음으로 보여서 놀란다. (개정판 서문 中) p.6 2. 노는 아이들 곁에 가서 귀를 기울이면 아이들의 몸속에서 피가 돌아가고 숨이 들고 나는 소리가 들렸다. 운동장 가득 아이들이 뛰어놀 때 그 소리는 다 합쳐져서 바람이 잠든 날에도 봄의 숲이 수런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아이들의 몸속을 돌아가는 피의 소리는 작은 냇물이 바위틈을 빠져나올 때처럼 통통거렸고 숨이 드나드는 소리는 어린 대숲 속으로 바람 한 줄기가 지나가는 것처럼 색색거렸다. 작지만 또렷한 소리였다. p.99 3. 나는 싸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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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요 네스뵈-소설/국외 2023. 12. 27. 13:24
1. “당신이 그랬어요. 인간은 본질적으로 바보라서 돌에든 피부에든 아무것도 새기지 말고 수용성 물감만 써야 한다고. 그래야 과거를 지우고 과거의 자기를 잊을 수 있다고.” (...) “빈 페이지라고 했어요. 새로운 사람이 되고, 더 나은 존재가 되기 위한 자유. 문신은 우리를 정의하고 낡은 가치관과 의견에 매달리게 한다면서. 당신이 가슴에 예수 문신을 새긴 걸 자주 예로 들었잖아요. 무신론자에게 예수 문신이 있는 게 터무니없어 보이니까 낡은 미신들에 매달리는 데 자극제가 되어준다면서.” p.401 2. “그래. 네가 얼마나 알고 싶은지는 네가 결정할 일이지.” 해리가 라켈한테 자주 하던 말이다. 그녀는 꼬치꼬치 캐묻지 않고 적게 묻는 습관을 들였다. p.659 3. 어릴 때 그가 노를 젓고 할아버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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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날도 있다> -마스다 미리-비소설/국외 2023. 12. 27. 11:32
1. 그 아저씨처럼 둔감한 사람에게 매번, 매번 심하게 상처를 받는다. ”세상에는 이런 사람도 있고 저런 사람도 있으니까“ 누가 이런 말로 위로해주더라도 도저히 미소 짓지 못하겠다. 상처가 마음속 깊이 파고들어 점점 더 괴로워진다. 하지만 그 아저씨는 자기 농담 때문에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음을 알 리가 없다. 혹시 자기가 비슷한 소리를 듣더라도 아무렇지 않은 다부진 마음의 소유자일 테니까. 나는 그런 다부진 마음 따위 부럽지 않다. 원하지도 않는다. 확실하게 상처를 받는 나 자신이, 그 아저씨보다 훨씬 더 마음에 든다. 마지막에는 그렇게 나를 달래면서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p.46 2. 이걸 왜 못하지? 어린 시절, 학원에서 어른들에게 툭하면 그 말을 들었다. 말하는 쪽은 딱히 화가 난 게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