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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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과 바닐라> -정한아-소설/국내 2023. 12. 19. 14:08
1. 온통 새것인 집 한가운데서 그녀는 홀로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였다. 나는 그녀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한 시간이 지나가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p.61 2. 당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말, 당신의 쓸모가 다했다는 말. 그런 말을 하고, 또 듣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자연스러운 일이라고도 했다. p.63 3. 방송사와 제작사 측은 내게 빨리 시인하거나 부인하는 입장을 밝히라고 했다. 나는 변명이나 해명을 해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내가 저쪽의 시나리오를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도 없을뿐더러, 저쪽에서 공개한 증거라는 게 헐거운 얼개만 있는 시놉시스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불씨를 키우는 것이야말로 저쪽이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아무 말도 듣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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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하지 않는다> -한강-소설/국내 2023. 12. 19. 12:21
1.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수많은 인파가 눈앞에서 활짝 갈라지며 자, 이제 넌 앞으로만 걸어, 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어. 가슴 한편은 조여들며 불안한데, 머리 위로 계속 얼음물이 끼얹어지는 것처럼 정신이 또렷했어. 이런 느낌을 자유라고 부르는 건가, 생각했던 기억이 나. pp.79-80 2. 막 내려앉은 순간 눈송이는 차갑지 않았다. 거의 살갗에 닿지도 않았다. 결정의 세부가 흐릿해지며 얼음이 되었을 때에야 미세한 압력과 부드러움이 느껴졌다. 얼음의 부피가 서서히 줄어들었다. 흰빛이 스러지며 물이 되어 살갗에 맺혔다. 마치 내 피부가 그 흰 빛을 빨아들여 물의 입자만 남겨놓은 것처럼. pp.185-186 3.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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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호실로 가다> -도리스 레싱-소설/국외 2023. 12. 19. 12:18
1. 두 사람의 훌륭한 인생은 분명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두 사람의 인생은 확실히 훌륭했다. 수전도 매슈도 가끔 이런 생각을 하면서 자신들이 만들어낸 결혼생활, 네 아이, 커다란 집, 정원, 파출부, 친구, 자동차 등을 내심 경이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다…… 바로 이것, 이 모든 것이 어느 날 갑자기 존재하게 된 것은 수전이 매슈를 사랑하고 매슈가 수전을 사랑하기 때문이었다. 대단한 일이었다. 그러니 사랑이 바로 삶의 중심이자 원천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다른 모든 것을 지탱할 수 있을 만큼 강렬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면, 그것은 누구의 잘못일까? 수전이나 매슈의 잘못은 확실히 아니었다. 원래 세상이 그런 탓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현명하게 상대를 탓하지도, 자책하지도 않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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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 -니콜라이 고골-소설/국외 2023. 12. 19. 11:08
1. 그 이후로도 그는 가장 즐거운 순간에도 “날 내버려 두시오. 어째서 당신은 저를 괴롭히는 겁니까?”라고 심장을 관통하는 듯한 말을 하는 이마가 벗어진 작은 관리가 생각났고, 이 관통하는 듯한 말 속에서는 “나는 너의 형제다”라는 또 다른 말이 울려 퍼졌다. 그러면 가련한 젊은이는 손으로 얼굴을 가렸고, 그 후 살아가면서 인간의 내면에 비인간적인 것이 얼마나 많은지, 세련되고 우아한 태도 속에, 아아, 심지어 고상하고 정직하다고 인정받는 사람에게도 난폭한 무례함이 얼마나 많이 감추어져 있는지를 보면서 수차례 몸서리를 쳤다.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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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사람들> -프레드릭 배크만-소설/국외 2023. 12. 15. 15:38
1. 가끔은 껍데기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슴이 정말 아플 때도 있다. 공과금도 내야 하고 어른도 되어야 하는데 어른이 되는 법을 몰라서, 어른이 된다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지독히 높은 일이라서 겁에 질릴 때도 있다. p.16 2. “나더러 아이를 과잉보호한대요. 알이 없어졌다는 걸 인정하기 싫어서 돌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펭귄 같다고. 인생으로부터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대요. 결국에는 우리 모두 인생에 잡아먹히기 마련이라면서.” pp.51-52 3. “비싼 음식점은 테이블 간 간격이 넓어요. 비행기 1등석은 가운데 자리고 없고요. 특급 호텔에는 스위트룸 고객들이 드나드는 출입문이 따로 있죠. 지구상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높은 곳에서는 가장 비싸게 팔리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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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한 조각> -크리스티나 베이커 클라인-소설/국외 2023. 12. 15. 15:17
1. “너무 작지만 그래도 계속 거기서 살고 싶으면요?” 마메이는 한숨을 쉰다. “어이구, 아가, 뭐 그렇게 어려운 질문을 하니? 용감하게 새집을 찾거나 깨진 껍데기 안에서 살아야겠지.” p.50 2. “필요한 시간만큼 기다려야 하는 일도 있는 법이지. 암탉한테 무작정 알을 낳게 할 수는 없으니까.” 앤디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는 대담해진다. “가끔 나도 빵을 좀더 빨리 부풀게 하고 싶지만 서두르면 망치거든.” p.124 3. 물은 따뜻하지만 차가워질 것이다. 바다는 유리장 같지만 수평선 저멀리서 바람이 점점 불어오고 있다. 장작불은 이글거리지만 잦아들 것이다. 월턴은 내 옆에서 팔로 내 어깨를 감싸안고 있지만 금세 떠날 것이다. pp.183-184 4. 그 많은 걸 해내려면 가스등에 달린 납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