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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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아고타 크리스토프-소설/국외 2023. 12. 1. 13:09
1. 우리가 ‘잘했음’이나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것들, 우리가 본 것들, 우리가 들은 것들, 우리가 한 일들만을 적어야 한다. 예를 들면, ‘할머니는 마녀와 비슷하다’라고 써서는 안 된다. 그것은 ‘사람들이 할머니를 마녀라고 부른다’라고 써야 한다. ‘이 소도시는 아름답다’라는 표현도 금지되어 있다. 왜냐하면, 이 소도시는 우리에게는 아름다울지 모르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추하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은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 써야만 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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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브라발-소설/국외 2023. 11. 30. 10:16
1. 그렇게 나는 스스로에게 소외된 이방인이 되어 묵묵히 집으로 돌아온다. p.16 2. 내 안에는 이미 불행을 냉정하게 응시하고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힘이 자리했다. 그렇게 나는 파괴 행위에 깃든 아름다움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p.23 3. “우리는 올리브 열매와 흡사해서, 짓눌리고 쥐어짜인 뒤에야 최상의 자신을 내놓는다.” (탈무드) p.26 4. 나는 피와 땀으로 범벅이 되어 일했다. 집시 여자들이 와 있던 내내 예수와 노자가 내 압축기 옆에 남아 있었지만 이제 나는 혼자였다. 줄처럼 감겨오는 검정파리들의 공격을 쉴새없이 받으며 버림받은 자가 되어 무작정 일에 매달렸다. 그러자 윔블던 대회에서 우승을 막 거머쥔 테니스 선수처럼 의기양양한 예수가 보였다. 반면 초라한 외관의 노자는 재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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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평범한 사람의 일기> -조지 그로스미스-소설/국외 2023. 11. 30. 10:13
1. 제 생각에 결혼은 아주 형편없는 연극처럼 보여요. 두 개의 역할(신부, 신랑)밖에 없잖아요. 신랑 들러리는 연기보다는 그냥 풍채로 한 몫 하는 남자 배우일 뿐이죠. 소리 내서 우는 아버지와 훌쩍이는 어머니를 빼면, 나머지는 옷을 잘 차려입고 비싼 선물로 보잘것없는 그들의 역할에 비용을 지불해야만 하는 엑스트라들 아니겠어요.“ 2. ‘중도(中道)’라는 말이 허틀 씨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나는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그 말에 대한 허틀 씨의 해석은 훌륭하면서도 가장 대담했다. 그는 분명 나를 놀라게 했다. 그는 “정말, 중도군요. 그런데 중도란 말이 두 단어로 된 ‘끔찍한 평범함’을 의미한다는 걸 아시는지요? 말하자면, 일등석 아니면 삼등석으로 타자. 공작부인 아니면 그녀의 식모하고 결혼하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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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유>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소설/국외 2023. 11. 29. 10:39
1. 할머니의 눈은 흐려져 있었다. 할머니의 일부는 안도했다. 할머니는 항상 의사소통에 곤란을 겪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할머니에게서 그런 노력을 기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할머니의 일부는 이미 이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근원으로 돌아간 것인지도, 아니면 하다못해, 할머니가 그리도 지독한 의심의 눈으로 바라보던 물질계를 떠나 멀리 간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던 할머니는 뒤에 남은 부분이었다. 그 부분은 어차피 그 모든 신비를 간직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자기가 그 신비를 원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했다. 병은 할머니를 민들레의 솜털 머리처럼 흩트렸다. 씨 몇 개가 붙은 잘린 꼭지, 로버트는 자기도 결국 그렇게 될까 생각했었다. pp.84-85 2. 할머니가 말하고 싶어 하는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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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이만, 다자이 오사무였습니다> -다자이 오사무-소설/국외 2023. 11. 29. 10:31
1. 풀이 무성하고 널따란 폐원(弊園)을 바라보며 나는 별채의 한 방에 앉아 웃음을 완전히 잃었다. 나는 다시 죽을 생각이었다. 아니꼽다면 아니꼽게 보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참으로 건방졌던 것이다. 나는 역시 인생을 드라마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드라마를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중략) 하지만 인생은 드라마가 아니었다. 제2막은 누구도 모른다. p.105 2. 세상에 헛똑똑이만큼 무서운 것도 없다. 그들은 10년 전에 외운 정의를 그대로 암기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새로운 현실을 자신이 외우고 있는 그 한 가지 정의 속에 억지로 끼워 맞추려 한다. p.110 3. 다시 말해서, 모르는 것이다. 이웃사람들의 고통의 성질, 정도를, 전혀 짐작도 하지 못하는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