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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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노트> -로제 마르탱 뒤 가르-소설/국외 2023. 11. 28. 10:12
1. 두 사람은 얼마 동안 서로 멍하게 얼굴을 마주보았다. 그러나 서로 상대방을 눈여겨보는 것은 아니었다. 두 사람은 각자 자기 생각의 비약을 좇고 있었다. p.23 2. 나는 이 꽃에서 저 꽃으로 꿀을 찾아다니는 꿀벌은 아니야. 나는 마치 단 한 송이의 장미꽃 속에 틀어박힌 검은 풍뎅이 같아. 풍뎅이는 장미꽃 속에서 살다가, 마침내 장미꽃이 꽃잎을 아물어 버리면, 이 마지막 포옹 속에서 질식하여, 스스로 선택한 꽃에 안겨 죽잖아. 오, 벗이여, 너에 대한 나의 애정도 그처럼 충실해! 너는 이 황량한 세상에서 나를 위해 피어난 다정한 장미꽃이고. 너의 정다운 가슴속 깊이 나의 어두움 슬픔을 파묻어 줘!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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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아니 에르노-소설/국외 2023. 11. 24. 15:38
1. 그렇다. 우리는 잊힐 것이다. 그것이 인생이며,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오늘 우리에게 중요해 보이고 심각해 보이며, 버거운 결과로 보이는 것들, 바로 그것들이 잊히는, 더는 중요해지지 않는 순간이 올 것이다. 이상한 일이다, 지금 우리는 언젠가 엄청나고 중요하게 여겨질 일이나 혹은 보잘것없고 우습게 여겨질 일을 알지 못한다. (...) 지금 우리가 우리의 몫이라고 받아들이는 오늘의 이 삶도 언젠가는 낯설고, 불편하고, 무지하며, 충분히 순수하지 못한 어떤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누가 알겠는가, 온당치 못한 것으로까지 여겨질지도. (안톤 체호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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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댄스댄스 2> -무라카미 하루키-소설/국외 2023. 11. 23. 11:36
1. “그런 건 내버려두면 몸 안에서 자꾸 부풀어 오르는 수가 있어. 억제할 수 없게 되는 때가 있는 거야. 이따금 공기를 뽑아주지 않으면, 펑하고 폭발해 버려. 알겠어? 그렇게 되면 살아가기가 어려워져. 무엇인가를 혼자서 떠맡는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야. 너도 고통스럽고 나역시 고통스러울 수가 있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아무도 이해해주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서로 이야기할 수 있어.” p.8 2. “용서한 건 아니에요.” 하고 유키는 말했다. “우선 화해하는 것뿐이에요. 그건 정말로 잘못한 일이었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어요. 알겠어요?” p.97 3. “내가 살아가고 있는 건 그러한 세계야. 미나토쿠와 유럽 자동차와 롤렉스를 손에 넣으면 일류로 여겨지지. 쓸모 없는 짓이야. 아무런 의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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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스댄스댄스 1> -무라카미 하루키-소설/국외 2023. 11. 23. 11:32
1. 그녀는 비처럼 어디선가 와서는,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다만 기억만을 남겨 놓고. p.29 2. 눈을 치우는 작업이나 다름없었다. 눈이 내리면 나는 그것을 효율성 있게 길옆으로 치웠다. 한 조각의 야심도 없었고, 한 조각의 희망도 없었다. 오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거침 없이 체계적으로 처리해 나갈 따름이었다. 정확하게 말해서 이건 인생의 낭비가 아니냐고 생각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종이와 잉크가 이만큼 낭비되고 있으니, 내 인생이 낭비되었다고 해도 군소리를 할 것은 아니지 않느냐, 하는 것이 내가 도달한 결론이었다. p.50 3. 그래서 나는 낭비라는 건, 고도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의 최대 미덕인 것이라고 그에게 가르쳐 주었다.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팬텀 제트를 사들여, 스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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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당신들> -프레드릭 배크만-소설/국외 2023. 11. 23. 11:29
1. “나는 너를 용서할 수 없어, 케빈. 하지만 너를 절대 버리진 않을 거야.” p.23 2. 레오는 열두 살이고 올해 여름에 사람들은 항상 복잡한 진실보다 단순한 거짓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짓에는 비교를 불허하는 장점이 있다. 진실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는 반면 거짓은 쉽게 믿을 수만 있으면 된다. p.31 3. 샤덴프로이데 : 남의 고통이나 불행을 보며 느끼는 쾌감. p.74 4. 모든 것에는 한계점이 있기 마련이고, 다들 ‘기쁨은 나누면 배가 된다’고 하며 슬픔의 경우에는 그 반대라고 우긴다. 하지만 어쩌면 그게 아닐지 모른다. 발목에 납을 매달고 물에 빠진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으면 서로의 구세군이 되기는커녕 가라앉는 속도만 두 배로 빨라질 뿐이다. 서로의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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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소설 2023. 11. 23. 10:49
1.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경우, 험프티 덤프티. (제이디 스미스) p.15 2. “바로 그거예요. 장만 아니면 내가 그런 경제적 능력을 가지고 있을 텐데!” “돈에 관한 한 가정은 금물이에요.” p.53 3. 세속적인 낸시 이모와 딴 세상 사람 같은 어머니, 몸집이 큰 낸시 이모와 여윈 어머니. 풍자만화 같은 그 대조적인 모습의 이면에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과거를 억제하거나 선택적으로 미화하는 일이었다. 그게 뭐라고들 그랬을까? 엘리너와 낸시는 독립된 개인이기나 했을까? 그들은 그저 그들의 신분과 가문의 특징을 나타내는 파편일 뿐이었을까? pp.58-59 4. 연애의 설렘은 사랑의 가장 고상한 표현을 성취할 것 같은 곳에 있지 않고 사랑이 가장 위협받는 곳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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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들> -요시다 슈이치-소설/국외 2023. 11. 22. 12:16
1. 오히려 자기 애인이 간호사가 아니라 의사가 된다는 데도 아무런 마음의 변화가 없는 것이 신기했고, 그것을 의식하는 순간 다른 뭔가가 변했다는 걸 깨닫게 되었다. 좀 더 간단히 말하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점점 더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는 게 아니라 점점 더 누군가를 싫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는 걸 알게 됐다. p.19 2. “아니, 그러니까, 잊으려고 하면 할수록 잊히지가 않아. 인간이란 건 말이다, 잊으면 안 되는 걸, 이런 식으로 맘에 담아 두고 있는 건가 보다.” “이런 식으로라니요?” “아니, 그러니까, 잊어야지, 잊어야지 노상 애를 쓰면서...” p.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