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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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하나의 문장> -구병모-소설/국내 2023. 11. 20. 12:57
1. 거기에는 답장을 보내지 않은 채 좀 이따 하교할 아이들의 간식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일어났다. 문득 다시 펼쳐보지 않을 책들의 일렬로 늘어선 등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방을 나섰다. 돌보아야 할 남편과 아이들, 엄마 아빠 동생까지 있는데 유일하게 나한테 없는 건 아내였다....... p.38 2. 물론 밥과 빨래와 청소를 했고 자신을 목둘레가 늘어난 임부복만 걸친 채 이완이 밖에 입고 나갈 셔츠와 바지를 다리는 한편 부족하거나 소진된 살림을 채웠으며, 서울에 돌아가서 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십원 단위까지 가계의 모난 부분을 두드려 맞추는 데 촉을 세웠다. 그러나 그중 어떤 것도 노동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눈에는 그녀가 무언가를 끊임없이 사들이는 모습만 보였고, 외간남자와 한가로이 티타임을 즐기는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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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모리미 도미히코-소설/국외 2023. 11. 20. 12:51
1. ‘친구펀치’라고 아시는지. 예를 들어 누군가의 뺨에 어쩔 수 없이 철권을 날려야 할 사정이 되어 주먹을 굳게 쥔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 주먹을 잘 보길 바란다. 엄지손가락이 주먹을 밖에서 휘감아 싸는데 그건 다른 네 손가락을 무쇠로 잠그는 것과 같다. 그 엄지손가락이야말로 우리의 철권을 철권이게 하여 상대의 뺨과 긍지를 무자비하게 뭉개버리는 것이다. 폭력이 더한 폭력을 부르는 것은 역사가 가르치는 필연이니 엄지손가락에서 생겨난 요원의 불길처럼 세계로 퍼져 나가 드디어 다가올 혼란과 비참 속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것들을 남김없이 변기에 흘려보내게 되리라. 그러나 여기서 일단 그 주먹을 풀고 다른 네 손가락으로 엄지손가락을 휘감듯이 쥐어보자. 이렇게 하면 남자 주먹 같던 울퉁불퉁한 주먹이 분위기를 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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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상에서 만나요> -정세랑-소설/국내 2023. 11. 20. 12:47
1. “남편과 나는 같은 시험에 붙었잖아. 그런데 가족들이 내게만 ”살살 다닐 직장을 들어가야 한다“고 말해. 왜 나는 살살 살아야 하지? 왜 그게 당연하지? 왜 나한테 그렇게 말해도 된다고 생각하지? p.19 2. 남자친구의 이름엔 버드나무가 있어. 버드나무는 한국어로도 일본어로도 중국어로도 발음이 크게 다르지 않아. 그 발음이 좋아서, 남자친구의 약간 길고 흰 얼굴이 좋아서, 안경이 잘 어울려서, 자다가 작은 지진이 있을 때면 명치 부분을 단단하게 안고 눌러줘서, 우울해할 때면 판다 동영상을 보여줘서. 대충 그런 이유로 좋아해. 중국인들은 어쩐지 판단에 대해서 쿨할 것 같았는데 그렇지도 않더라. 어두운 방에서 모니터만 빛내며 판다 동영상을 무한 반복해서 보고 있는 남자친구를 보면 가끔 짠해. 그런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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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쳐다보지 마> -마이클 로보텀-소설/국외 2023. 11. 17. 14:17
1. 희망의 샘은 마르지 않는다지만, 나는 샘을 너무 깊이 판 나머지 바짝 말라버렸음을 발견한 듯한 기분이 든다. p.16 2. “진정하세요, 여러분. 여기 모인 우리는 모두 친구들입니다.” 나는 배너먼이 주의 깊게 택한 표현에 손발이 오그라든다. 신경에 거슬리는 말이다. 거짓된 친밀감, 가식 어린 연대감. 우리 모두가 친구라는 걸 당신이 어떻게 알지? p.61 3. 그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는 오래된 체로키 전설인데,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우리 내면에서 싸우고 있는 두 늑대에 관해 알려준다. 한 늑대는 분노, 질투심, 슬픔, 후회, 탐욕, 거만함, 어리석은 자존심, 그리고 자아로 가득하다. 다른 늑대는 즐거움, 평화, 사랑, 희망, 겸손함, 다정함, 진실과 공감으로 가득하다. 손자가 묻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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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보이> -팀 보울러-소설/국외 2023. 11. 17. 14:13
1. 이제와서 스스로를 탓하는 건 소용없는 일이다. 그런다고 나아질 것도 없는데, p.165 2. 내일은 어떤 일이 일어날까. 할아버지에게는 얼마나 많은 내일이 남아 있을까. 할아버지는 앞으로도 항상 곁에 있을 것처럼 말했다. 제스 역시 그 낙천적인 이야기들을 들으며 즐거워했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제스가 알고 있는 내일은 단 하루뿐이었다. 그 앞에 펼쳐져 있을 ‘다른 내일’들은 바로 다음 순간 다가올 ‘내일’이 지난 후에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p.216 3. “강물은 알고 있어. 흘러가는 도중에 무슨 일이 생기든, 어떤 것을 만나든 간에 결국엔 아름다운 바다에 닿을 것임을. 알고 있니? 결말은 늘 아름답다는 것만 기억하면 돼.” “하지만 죽음은 아름답지 않아.” 그녀는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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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미안하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김동식-소설/국내 2023. 11. 17. 13:38
1. 인간들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창조될 생명체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더 완벽한 가축이 되어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가축들을 합쳐도 이보다 더 쓸모 있어 보이진 않았다. TV로 지켜보던 사람들도 감탄하며, 새롭게 창조될 인류의 가축을 기대했다. 해가 뜨기 전, 인류의 대표가 정리된 서류를 가지고 알에게 다가가 말했다. “너는 자가 번식이 가능한 자웅동체이며, 매일매일 알을 낳아 번식한다. 네가 성체가 되어 자라나는 데 걸리는 기간은 일주일이며, 성체의 크기는 돼지와 소의 중간 정도이다. 너는 모든 질병에 면역이 되어 있으며, 뭐든지 잘 먹는 잡식성이고, 몸에선 양처럼 고운 털이 나며, 그 가죽은...” (...) 알에 금이 가며 껍데기가 산산이 깨어져 나갔다. “오오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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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소설/국외 2023. 11. 16. 11:25
1. 로스토프 백작, 이 방에 있는 여러 사람이 당신은 아주 매력적인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서 놀라고 있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소. 하지만 나로서는 전혀 놀랍지 않소. 매력은 유한계급의 마지막 야망이라는 걸 역사가 보여주었으니까. 내가 놀랍다고 생각하는 건 문제의 시를 쓴 사람이 이토록 눈에 띄게 목적 없는 사람이 될 수도 있구나 하는 점이오. p.16 2. 하지만 예술이란 가장 부자연스러운 국가의 앞잡이다. 그것은 무엇을 하라는 지시에 지치는 것보다 반복되는 일에 훨씬 더 빨리 지치는,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사람들에 의해 창조될 뿐만 아니라 짜증날 정도로 모호하기 때문이다. 조심스럽게 직조된 대화가 명명백백한 메시지를 전달하려 할 경우에도 약간의 냉소나 눈썹을 치키는 행동 하나만으로 전체 효과를 망쳐 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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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바> -에드워드 세인트 오빈-소설/국외 2023. 11. 16. 11:20
1. “공허한 협박은 어김없이 나약함의 표시야.” p.94 2. 하지만 그는 너무 오래 혼자 있었던 데다 지금은 강제된 공상 속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공상 속의 영상은 그가 느끼고 싶지도 않고 상상하기조차 싫은 것들을 보여 주는 데 전문가였다. p.159 3. 그런데도 이 참혹한 소식에 보이는 그의 반응에 무언가 빠진 게 있었다. 그는 어찌 된 일인지 이모저도 생각하는 가운데 문득 자기가 격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벽에 걸려 있던 익숙한 그림을 치우고 아무것도 걸리지 않은 못과 액자 자국만 남았을 때, 그제야 그 자리에 걸려 있던 그림을 의식하게 되는 것처럼, 그는 격분을 하지 않았을 때 그제야 비로소 결코 만족할 수 없는 세상사의 본질과 맞붙어 끊임없이 벌이는 다툼에서 자신의 대단한 ‘활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