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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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백수린-소설/국내 2023. 12. 13. 13:20
1. 회식 자리에서 모두와 잘 지내기 위해 관심도 없는 가십을 주고받고 재미있지도 않은 농담에 크게 웃다가도 심야 버스를 타고 한강 다리를 건널 때면 마음을 박탈당한 사람처럼 공허해지던 나. p.17 2. “나는 용감한게 아니야. 단지 그런 척하는 거지. 척을 하다보면 그래지기도 하니까.” p.18 3.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고, 각자의 역할이 있어. 거기에 만족하고 살면 그곳이 천국이야. 불만족하는 순간 증오가 생기고 폭력이 생기지. 증오와 폭력은 또다른 증오와 폭력을 낳고 말이야. 그게 우리가 지난 반년을 보내고 얻은 교훈이야.” pp.64-65 4. (...) 다미가 가볍고 경쾌한 목소리로 웃어서, 나의 코끝으로 어디선가 아카시아 꽃향기가 불어왔다. 높이, 높이 날아오를 것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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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재가 노래하는 곳> -델리아 오언스-소설/국외 2023. 12. 11. 11:12
1. 우리 인간은 마치 기다란 목이 있으면서도 그걸 안 써서 높은 곳에 잎사귀를 따먹지 못하는 기린 같은 존재야. p.164 2. 왜 상처받은 사람들이, 아직도 피흘리고 있는 사람들이, 용서의 부담까지 짊어져야 하는 걸까? p.247 3. “조니 오빠, 내가 지금은 좀 지쳤나봐. 아니, 완전히 진이 빠졌어. 부탁이야. 난 혼자서 이겨내야 해. 재판이랑, 감방이랑, 사형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랑... 나 혼자서 이겨내야 한다고. 내가 알고 살아온 건 그뿐이란 말이야. 위로받는 법도 몰라. 이런 대화조차 힘들어서 더는 못하겠어. 나는...” p.4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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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증명> -모리무라 세이치-소설/국외 2023. 12. 11. 10:11
1. 가면이 아무리 커진다고 해도 본 얼굴이 죽는 것은 아니다. 본 얼굴이 일시적으로 숨겨질 뿐이다. 그러나 가면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 본 얼굴이 되어버렸다면? 다른 얼굴이 옛날의 본 얼굴을 덮는다면? 덮인 본 얼굴은 끝내 되돌아오지 않을 테지. 그것은 본 얼굴의 변질이다. pp.89-90 2. “단지 함께 걸어가는 것뿐이지, 각자가 고독하다는 본질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나는 피붙이나 친구들은 편대를 이루고 날아가는 비행기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편대를 이룬 비행기?” “그렇습니다. 어떤 비행기에 고장이 생기거나 또는 비행사가 부상을 입고 비행불능이 되어도 함께 가던 비행기가 대신 조종해 줄 수는 없습니다. 도와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옆으로 다가서서 격려를 하는 정도지요.” “그래도 그나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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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김훈-소설/국내 2023. 12. 8. 13:58
1. 나는 정치에 아둔했으나 나의 아둔함이 부끄럽지는 않았다. p.23 2. 나는 임금이 가여웠고, 임금이 무서웠다. 가여움과 무서움이 같다는 것을 나는 알았다. p.44 3. 나는 개별적인 죽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온 바다를 송장이 뒤덮어도, 그 많은 죽음들이 개별적인 죽음을 설명하거나 위로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여자가 죽으면 어디가 먼저 썩을 것인지를 생각했다. 나는 그 썩음에 손댈 수 없을 것 같았다. 죽은 자는 나의 편도 아니고 적도 아니었다. 모든 죽은 자는 모든 산 자의 적인 듯도 싶었다. 내 몸은 여진의 죽은 몸 앞에서 작게 움츠러들었다. 나는 죽은 여진에게 울음 같은 성욕을 느꼈다. 세상은 칼로써 막아낼 수 없고 칼로써 헤쳐나갈 수 없는 곳이었다. 칼이 닿지 않고 화살이 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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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헤르만 헤세 지음, 정홍택 옮김-소설/국외 2023. 12. 8. 12:55
1. 모든 인간의 생활은 자신으로 향하는 하나의 길이고, 그 길을 가는 시도이며 좁은 길의 암시이다. 일찍이 어느 누구도 완벽하게 그 자신이 된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 나름으로는 그 자신이 되어 보기 위해 어떤 사람은 다소 우둔하게, 또 어떤 사람은 보다 명석하게, 자기의 힘이 닿는 만큼 노력한다. 자신의 힘이 미치는 한 누구라도 자신의 출생의 잔재를, 태고 적의 정액과, 알의 껍질을 마지막까지 끌어안고 있다. 끝끝내 인간이 되지 못하고 개구리나 도마뱀, 개미에 머물러버리는 일도 허다하다. 머리는 사람이지만 몸은 물고기인 사람도 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누구나 인간을 향해 던져진 자연이다. 우리 모두는 어머니로부터 태어난다. 모든 인간은 동일한 심연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심연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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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하루가 다르다면, 그것은 왜일까> -배수아-소설/국내 2023. 12. 7. 13:55
1. 누군가 나를 이쁘다, 좋다 하면 나는 불안하고 믿기지 않는다. 처음 수업에서 이름을 잘못 불렸을 때 같은 불안감이다. p.20 2. 그녀의 자리에는 그녀와 비슷한 용모를 가진 또다른 여비서가 같은 종류의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그녀라는 존재의 개별성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나를 포함해서 사람들은 그녀 자체를 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어요.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보통의 것이었습니다. 반드시 그녀여야만 했던 존재의 당위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건 그녀의 잘못이 아니었죠. 생의 반 이상을 살게 되어서 이제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더 가까워진 사람이라면 눈치채게 되는 어떤 운명의 비밀이죠. p.116 3. 나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간다는 것은 단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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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져 내리다> -스콧 피츠제럴드-소설/국외 2023. 12. 7. 13:33
1. 그 2년 동안 무언가를(그것이 내면의 속삭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키기 위해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멀리해 왔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그렇게 아침의 칫솔질부터 친구와의 저녁 식사까지 삶의 모든 행동이 힘겨운 노력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오랜 시간 사람이든 사물이든 좋아하지도 않는 걸 좋아하는 척 허접한 흉내면 내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죠.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한 사랑조차 사랑하려는 시도가 되어버렸고, 편집자나 담배 장수, 친구의 아이와 가졌던 허물없는 인간관계조차 의무감에 충실했던 일로 기억될 뿐이었습니다. p.28 2. 그녀는 그렇게 자신이 겪은 과거 고통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얼핏 듣기에도 내 고통보다 훨씬 비통해 보였지요. 그녀는 어떻게 그런 고통과 마주했고 무시했으며 이겨냈는지를 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