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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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너머로 달리는 말> -김훈-소설/국내 2023. 12. 7. 13:10
1. 칼을 한 번 휘둘러서 적을 베지 못하면 내가 죽을 차례다. 칼이 적 앞에서 헛돌았을 때 나의 전 방위는 적의 공세 앞에 노출된다. 이때 수세를 회복하지 못하면 적의 창이 내 몸에 꽂힌다. 나의 공세 안에 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고 적의 수세 안에 나의 죽음이 예비되어 있다. 적 또한 이와 같다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생사는 명멸한다. 휘두름은 돌이킬 수 없고 물러줄 수 없고 기억할 수 없다. 모든 휘두름은 닥쳐오는 휘두름 앞에서 덧없다. 수와 공은 다르지 않고 공과 수는 서로를 포함하면서 어긋난다. 모든 공과 모든 수는 죽음과 삶 사이를 가른다. pp.22-23 2. (...) 땅에 뿌리를 박고 올라오는 푸른 것들은 어디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땅이 스스로 밀어 올리는 숨결이라고 강남 사람들은 믿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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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스푼의 시간> -구병모-소설/국내 2023. 12. 7. 11:16
1. 세상은 한 통의 거대한 세탁기이며 사람들은 그 속에서 젖은 면직물 더미처럼 엉켰다 풀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닳아간다. 단지 그뿐인 일이다. 2. 예리한 칼날이 아니다. 관계란 물에 적시면 어느 틈에 조직이 풀려 끊어지고 마는 낱장의 휴지에 불과하다. 3. “보편적인 삶은, 아니 그냥 삶은, 어떤 것입니까.” (...) 데어버리도록 뜨겁고 질척거리며 비릿한 데다, 별다른 힘을 가하지 않고도 어느 결에 손쉽게 부서져버리는 그 무엇. 4. 어차피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해야 할 일만 하더라도, 사람은 살아 있는 이상 돈을 쓰게 된다. 숨만 쉬면서 살아도 비용이 든다. 숨을 쉬는 일, 입을 여는 일 자체가 극도의 무게를 동반하는 것이다. 자신 이외의 한 사람 이상과 관계를 맺고 산다면 감당해야 할 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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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내인간> -이석원-소설/국내 2023. 12. 5. 12:21
1. 사람이 누굴 좋아하고 헤어지는 데 이유라는 게 그렇게 부질없는 거더라고. 그러니 누굴 어떻게 만나든 아, 우린 그냥 만날 수밖에 없어서 만났구나, 그러다 헤어져도 아, 헤어질 수밖에 없어서 헤어졌구나 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거야. 이유 같은 거 백날 고민해봤자 헤어졌다는 건 달라지지 않으니까. p.57 2. 고통을 견디는 법은 한 가지밖에 없어. 그저 견디는 거야. 단, 지금 아무리 괴로워죽을 것 같아도 언젠가 이 모든 게 지나가고 다시 내 마음이 편안해지는 순간이 오리라는 믿음. 그거만 저버리지 않으면 돼. 어쩌면 그게 사랑보다 더 중요할지도 몰라. (...) 믿어. 믿으면 아무도 널 어쩌지 못해.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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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니가 보고 싶어> -정세랑-소설/국내 2023. 12. 5. 11:21
1. 인생이 테트리스라면, 더 이상 긴 일자 막대는 내려오지 않는다. 갑자기 모든 게 좋아질 리가 없다 .이렇게 쌓여서, 해소되지 않는 모든 것들을 안고 버티는 거다. p.52 2. 연애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했다. 되도 않는 이야기를 토해내고 나면 조금 괜찮아지는 편이지만, 언젠가 이야기가 더 이상 생각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걸까? 제대로 기능하는 사회인으로, 독립적인 경제인으로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며, 간절히 유지하고 싶은 상태이다. 그러니 이렇게 가끔씩 자기 점검을 해야 한다. 오늘은 괜찮은가, 이번주는 괜찮은가 꼼지락꼼지락거려보는 것이다. 원전폐기물 보관함처럼, 위태롭지만 조용하게, 엉망인 내부를 숨기면서 사는 건 모두가 마찬가지 아닐까? 뭔가 중요한 부분이 고장나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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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의 얼굴> -이청준-소설/국내 2023. 12. 5. 11:10
1. 언제나 망설이기만 할 뿐 한 번도 스스로 행동하지 못하고 남의 행동의 결과나 주워 모아다 자기 고민거리로 삼는 기막힌 인텔리였다. 자기 실수만이 아닌 소녀의 사건을 자기 것으로 고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양심을 확인하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을 확인하고 새로운 삶의 힘을 얻으려는 것이었다. p.69(‘병신과 머저리’) 2. 그는 글을 쓰게 된 애초의 동기가 자신의 개인적인 삶의 위로와 구제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또 한술 더 떠 그것을 다시 복수심 때문이라 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복수심이라는 개인적인 동기와 관련하여 바깥 세계에 대한 작가의 책임은 서로 이율배반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그것을 솔직하게 인정하고 그런 관계 안에서 작가의 책임이라는 걸 찾아볼 수밖에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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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11, 책 18> -다그 솔스타-소설/국외 2023. 12. 1. 14:21
1. 그녀가 이미 시들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모두 알다시피 세월이 흐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들은 그녀와 일상을 살아가는 일은 비에른 한센에게 맡겨두고, 어깨를 으쓱하며 떠나갔다. p.63 2. “시간은 흐르는데, 권태는 도통 사라지지 않아요.” p.86 3. “생각해 봐요. 평생을, 그것도 내 평생을 살면서 내 마음 속 가장 깊은 곳의 욕구를 알아봐주는 곳으로 가는 길을 찾아내지 못하다니! 나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침묵 속에 죽을 겁니다. 할 말이 없으니까요. 이런 생각을 하면 겁이 납니다.” pp.86-87 4. “세상에 영원한 진리는 없어요. 정신없이 돌아가는 삶의 리듬이 있을 뿐이죠. 그때그때의 상황은 창공이고, 완벽한 사람들은 거기에 떠 있는 별이에요.”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