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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헤르만 헤세-비소설/국외 2023. 11. 1. 11:36
1. 거대한 여름목련나무를 북쪽 지방의 봄목련나무와 혼동하면 안 된다. 여름목련나무는 그처럼 아름답긴 하지만 늘 나의 다정한 친구이기만 했던 건 아니다. 어떤 계절에는 근심 어린 생각에 잠겨, 적대감을 갖고 그 나무를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그 나무는 10년 동안 내 이웃으로 지내면서 자라고 또 자라 무성하게 뻗어 나갔다. 봄가을 몇 달 동안은 아침의 한 줌 햇빛도 그 나무에 가려 내 방 베란다에 궁둥이를 붙이지도 못하고 지나갔다. 나무는 마치 거인 같았다. 어떤 때 보면 수액을 철철 내뿜으면서 격렬하고 무성하게 성장하는 것 같다. 강인한 힘으로 신속하게 위로 뻗쳐 나가면서도 때로는 어딘지 눅눅하게 흐늘거리는 젊은이처럼 보인다. 그러다가 한여름 꽃피는 시절이 되면 나무는 화려하고 충만하고 부드러운 위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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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여름> -헤르만 헤세-비소설/국외 2023. 11. 1. 11:34
1. 세상은 더 아름다워졌다. 나는 혼자지만, 혼자 있는 것 때문에 고통스러워하지는 않는다. 다른 어떤 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햇볕에 푹 익을 용의가 있다. 나는 숙성되기를 갈망한다. 죽을 용의도 있고, 다시 태어날 용의도 있다. 세상은 그 이후로 더 아름다워졌다. (『방랑』중에서, 1818~19년) p.26 2. 나는 배낭을 나뭇가지에 걸고 입고 있던 옷들을 성급히 벗는다. 뜨겁게 달궈진 자갈 위에 맨발로 서니 발꿈치가 견디기 힘들다. 얕은 물속으로 발을 들여 놓으니 다기처럼 따스하다. 먼저 물밖에 몸을 내밀고 수영을 하니 약간 서늘함이 느껴진다. 나는 더 깊이 물속의 검푸른 심연 속으로 몸을 넣었다. 등을 물 위에 대고 오랫동안 떠 있었다. 파도가 변덕스럽게 내 눈과 입 위로 철썩 철썩 스쳐가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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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세, 사랑이 지나간 순간들> -헤르만 헤세-비소설/국외 2023. 11. 1. 11:26
1. 그러나 대부분 사람은 진실로 중요시해야 할 내면의 세계를 너무 일찍 버리고 근심과 원망, 그리고 목적에 둘러싸인 가지각색의 생각 속에서 일생 동안 혼돈스럽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결코 그들의 가장 깊은 내면에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다시금 내면으로, 영혼의 집으로 데려올 수는 없다. p.35 2. 저 아름다운 여름날 저녁에 나는 친숙한 사람들만 모이는 정원회합의 일원으로 겔프케 박사의 초대에 응해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못했다. 사람들과 어울려 그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질문에 대답해야 하는 일을 나는 원치 않았다. 나는 그런 일에 너무 지쳐 있었고 무관심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는 내가 잘 지내고 잘 정돈되어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마지못해 거짓말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p.68 3. 나에게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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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견디는 기쁨> -헤르만 헤세-비소설/국외 2023. 11. 1. 11:23
1. 그런데 더 안타까운 일은 그렇게 조바심을 내는 것이 우리가 겨우 여가 시간을 누리는 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다. 여가 시간에도 서두르고 바삐 움직이는 것이 일을 할 때보다 신경을 덜 쓴다거나 덜 피로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우리의 목표는 ‘가능한 한 많이, 가능한 한 빠르게’가 되었다. 그 결과 쾌락은 점점 더 많아졌지만 즐거움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p.13 2. 정해진 틀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씩 10시간 정도 푹 자는 것도 좋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느라 소비해 버린 시간과 그로인해 잃어버린 쾌락을 대체할 만큼 상쾌한 기분을 느끼며 놀라움을 감출 수 없게 될 것이다. p.16 3. 단지 무엇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누구나 사소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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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E-Book -제임스 조이스-소설/국외 2023. 11. 1. 11:21
1. 부적절한 미학적 수단으로 자극되는 욕망과 혐오는 실은 미학적인 감정이 아니야. 그 성격이 동적이기 때문만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지. 우리의 육신은 순전히 신경 시스템의 반사 작용에 의해서 싫어하는 것으로부터 움츠러들고 욕망하는 것의 자극에는 반응하지. 파리가 눈으로 들어오려고 하면 의식하기도 전에 눈을 감잖아. ─ 늘 그렇진 않아. 린치가 시비조로 말했다. ─ 마찬가지로, 하고 스티븐이 말했다. 네 육체는 벗은 조각상의 자극에 반응한 거지만, 내 말은, 그게 단순히 신경의 반사 작용이었다는 거지. 예술가가 표현한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동적인 감정이나 순전히 육체적인 감흥을 일으킬 수가 없어. 그건 미적인 정지(停止), 관념적인 연민 혹은 관념적인 공포, 내가 아름다움의 리듬이라 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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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 앞에서> -프란츠 카프카-소설/국외 2023. 11. 1. 11:14
1. 모든 다른 죄악에서 비롯되는 두 가지 인간적 죄악이 있으니, 초조와 태만이다. 초조 때문에 그들은 낙원에서 추방되었고, 태만 때문에 되돌아가지 못한다. 그런데 어쩌면 단 하나의 근본적 죄악이 있으니 초조다. 초조로 인해 그들은 추방되었고, 초조로 인해 되돌아가지 못한다. p.11 2. 뱀의 중재가 필요했으니, 악은 인간을 유혹할 수 있지만 인간이 될 수는 없다. p.21 3. 그가 사는 건 자신의 개인적 삶 때문이 아니고, 그가 생각하는 건 자기의 개인적 사고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한 가족의 강박에 의해 자기가 살고, 또 생각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자체로 생명력과 사고력이 지나치리만큼 풍부하기는 하지만, 그가 모르는 어떤 법칙에 따라 일종의 형식적 필연성을 지니는 가족 말이다. 이 알지 못하는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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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좁아도 홀가분하게 산다> -가토 교코-비소설/국외 2023. 10. 31. 13:45
1. ‘무엇을 버릴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새집에 가져갈 것인가’라는 관점으로 선택하면 물건이 자연스럽게 추려진다. p.152 2. “허리가 꽉 죈다고 해서 고무줄 치마를 입으면 살이 더 찌듯, 물건이 늘었다고 해서 수납공간을 늘리면 물건만 더 늘어난다.” p.176 3. 모자람이 꼭 불행하다는 뜻은 아니다. 꽉 채워진 상태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모자람에서 나오는 간절함이 오히려 우리 삶을 풍성하게 만드는 에너지로 작용한다. 모자람이 있고 채워져야 할 곳이 있는 곳에서 희망을 갖는 게 사람이다.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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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카멘친트> -헤르만 헤세-소설/국외 2023. 10. 31. 13:42
1. 몇 주일의 세월이 견딜 수 없이 따분하게 흘러갔다. 이 분노와 갈등으로 얼룩진 절망적인 시간 때문에 내 젊음이 모두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았다. 한편으로는 행복한 꿈이 삶에서 그토록 빨리 와해되는 것을 보면서 놀라워하고 분통도 터뜨렸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현재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이 돌발적이고 강렬하게 성장한 데에 또한 놀라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pp.50-51 2. "그런 사랑이 당신을 행복하게 하는지 아니면 비참하게 하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니면 그 둘 다입니까?“ “아, 사랑이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가 고통과 인내 속에서 얼마나 견딜 수 있는지를 알려 주기 위해 있는 것 같아요.” p.84 3. 죽음은 냉정했지만, 뛰쳐나간 아이를 집으로..